백지혜:...광... (머뭇... 제 앞에 선 이의 행색을 잠깐 살펴본다...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가 맞는데...) 광철아..?
오광철:일단 말이 통해서 다행이긴 한데... (옆에 털썩 주저앉은 뒤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 아는 사이야? 그게 내 이름인 건 기억하는데...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 알려줘.
백지혜:아는 사이를 고사하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살았잖아요?! (양 팔을 붙잡고 고개를 팍! 디밀어 시선 맞춘다.)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도 전부 돌리고, 심지어 그 입에 담기 무서운 인천 4대 조폭가를 찾아가기도 했는데 찾기는 커녕 형님 무사 안 하면 제 목으로 댓가를 치르겠다고 ...(생략) 대체 어쩌다가 기억 상실까지 걸리신 겁니까!
오광철:아. 같이 사는 사이야? (곤란한 듯 마주친 시선을 피했다.) 우리 그냥 같이 살기만 했지? 사귀거나 그러는 거 아니라, 그냥 동거인. 네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음. 당황스러우니까? 애초에 나 여기 몇 년이나 혼자 있었고... (딱 봐도 무언가를 숨기는 눈치. 몇 초 침묵하다 말을 돌렸다.) ... 나 찾겠다고 조폭가는 왜 찾아갔어? 그쪽에 아는 사람 있어?
백지혜:(하는 말들을 가만히 듣다 중간에 끼어든다.) 잠깐, 몇 년? 처리가 사라진 건 고작 오늘로 5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을 리 없어요. (다시 천천히 모습을 살펴본다. 얼굴이며 목소리, 키나 체구... 체향은 좀 다른 것 같지만, 이렇게나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리 없는데. 눈매가 가늘어진다. 붙잡을 팔을 놓고 제 왼손 약지를 가르킨다.) 동거인? 결혼했습니다. 그런 사이가 아니고서 한 사람을 애타게 찾아다닐 리 없잖습니까...
오광철:(순식간에 눈빛에 의심이 피어난 채 노려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숫자 세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거든? 정확하게 날짜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섬의 주인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니 적어도 4년은 넘었어. 확실해. (살펴보는 시선에 몸을 뒤로 빼곤 왼손 약지를 잠시 노려보다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춘다.) ... 믿지 못하겠어. 다른 사람과 헷갈린 거 아냐? 난 그런 반지 몰라. 5일과 몇 년을 구분도 못하는 시간감각 없는 사람은 더더욱 몰라. 내가 그런 사람과 결혼했을 리 없어.
백지혜:허... (말을 나눌수록 이상한 점만 잔뜩 생기는 기분이다. 확실히, 단 며칠 만에 머리가 저렇게 자랄 일도, 조금 나이를 먹은 태가 날 일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신 또한 숫자 세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이거 그건가, 공상과학을 주제로 한 시간여행? 혹은 어떤 예능의 몰래카메라라던가. 후자가 더 좋겠지만, 샅샅이 살펴봐도 카메라가 안 보인다. 게다가 제가 아는 광철은 이렇게 연기를 잘하지 않는다. 당혹감과 허탈함에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한다.) 이름 빼고 다 꺼먹어 드신 분이 어떻게 그건 확신하십니까?! 취향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스스로 말해놓고 꽤 부끄러웠는지 볼이 붉어진다. 잠시 숨을 고른다.) ...섬의 주인은 또 무슨... 여기에 4년 넘게 살았다고요? 애초에, 어딥니까? (모래사장에 손을 짚고 한 움큼 쥐었다 놓는다. 사르르 떨어지는 감촉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여기는. 입으신 모양새를 보니 한국은 아니겠고.........
오광철:내가 기억하는 건 내 이름뿐이지만 나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잖아. 내 마음이 넌 아니라고 하는걸.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꽤 마음에 드는 거 같다. 일단 사라진 배우자를 위해 밤낮으로 찾으러 다닐 수 있다는 사람인 점이 좋아, 스스로 말하고 붉어진 뺨도 조금 귀여운가?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인 게 정말 좋아서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이런 사람과 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마저 머릿속을 스치는 바람에 무심코 미소 지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몰라.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 있었고, 가끔 오는 섬의 주인을 제외하면 움직이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그 섬의 주인도 제대로 말이 통하는 사람은 아니고... (잠시 고개를 돌려 먼바다를 바라본다. 투명할 정도로 맑은 바닷속에는 물고기 한 마리도 없고, 심지어 이런 날씨임에도 날벌레 하나 날아다니지 않는다.)
백지혜:거 참, 의견이 확고하셔서 좋으시겠습니다. (빈정거리며 답하곤 고개 돌린다. 며칠 만에 겨우 만났더니 기억도 다 잃고 혼자 시간도 몇 배로 집어 먹다니. 그래도 몸 성히 잘 살아있어 다행이긴 한건가... 고개 돌린 김에 주변을 살펴본다. 푸르르고 투명한 바다, 넓고 깔끔한 모래사장... 이런 곳에서 몇 년이나 살았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심심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을 텐데. 게다가 제가 아는 오광철이란 사람은 더 못 버틸 거 같은 성격인데... 기억과 함께 도파민 추구 성향도 씻겨 나갔나. 무심코 바라본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리자 마음 한켠이 아련해진다.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이렇게 애틋한데. 기억 좀 잃은 게 뭐 대수겠나. 더 큰 일인 건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거겠지...) 나가고 싶진 않으십니까? 굳이 여기서 혼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일 년에 한 번 오는 섬의 주인이란 작자보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숨은 붙어있는지... (안 돌아가 주면 제 숨도 날아가기도 하고요.)
오광철:섬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크게 안 했던 거 같아. 가만히 낮잠 자다가, 산책하다가... 그럼 하루가 금방 지나가니까. 그리고 섬의 주인이 찾아오는 건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손가락을 하나 들어 이마를 꾹 눌렀다.) 나중에 돌아가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인사 전해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마치자 광철은 내려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합니다.
오광철:일단 집으로 갈까... 해변에 쓸려오며 생긴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고, 모래도 씻어내야 하잖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넓지 않은 해변 끄트머리쯤부터 돌계단이 이어져 있고, 그 위로 화려하게 생긴 건물이 보입니다.
앞선 이를 따라 몸을 일으켜보면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행이지요. 해변에서 눈을 떴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데에 무리가 없는 몸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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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치는 소리 그리고 두 명 분의 발소리. 고요한 소음과 함께 나아갑니다.
방금까지의 이야기대로 눈 앞에 있는 오광철은 기억에 있는 것보다 확실히 나이를 더 먹은 모습입니다.
알던 모습보다 묘하게 얌전하고, 길어진 머리카락은 한 가닥으로 땋아 늘어트렸습니다.
당신이 알던 사람과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는 그이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단 확신이 듭니다.
당신을 반기지 않는 모습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게 하고, 땋은 머리카락은 혼자 땋는 게 어색한 건지 어설픈 티가 나는. 여전히 작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동생이자 연인.
아, 몇 년 정도 혼자 이 섬에서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제는 동생이 아닐지도요...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면 몸에 걸친 하늘하늘한 천은 몸 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쓴 베일 끝의 술이 태양빛에 화려하게 반짝입니다.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있고, 귀에서도 귀걸이가 길게 늘어져 턱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보석이 박힌 팔찌며 발목에는 챰이 달린 금속 발찌를 차고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액세서리들로 도배를 했으나 유독 손가락에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손을 등 뒤로 숨기기도 했었죠. 사라지기 전 손에 끼워준 결혼반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백지혜:...처음 이 섬에 오셨을 때는 기억 하십니까? 입고 있던 옷차림이라거나, 뭐... 손에 끼워진 반지 같은 거나? (성큼 걸음 옮겨 앞질러가던 네 뒤 가까이에서 묻는다.)
오광철:처음 왔을 때...? (짧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눈을 떠보니 아까 그 해변이었고, 옷도 지금이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아. 그때는 섬의 주인이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직접 집으로 안내해 줬어.
백지혜:오호... (의문감만 늘었다...) 그 섬의 주인이란 사람은 누굽니까? 일단 사람인 거죠? 이런 섬에 곰이 산다거나... (제 두 팔을 꼬옥...)
오광철:키는 대충 이 정도에... (머리 위로 쭉 팔을 올린다. 못 해도 2m?) 팔이 길고 엄청 말랐어. 첫날을 제외하곤 밤에만 만났으니 얼굴은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일단 사람 맞을걸? (빤히...) 무서워?
백지혜:(손 따라 시선이 주욱 올라간다. 못 해도 2m에 팔이 길고 엄청 마른... 사람? 예전에 본 공포게임 실황 같은 게 떠올라 고개를 젓는다.) ...아뇨? 괜찮습니다. (위험해 보이면 그 얇은 팔을 부러트리고 튀리라.)
오광철:(고개를 젓는 모습 바라보다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린다. 처음으로 하는 타인과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그만.) 그거 허세지? 어차피 둘이 만나지 않게 할 생각이었으니 마음 놓고 무서워해도 되는데...
백지혜:왜 멋대로 제 미팅을 캔슬하십니까? 전 그 사람과 만나 대화하고 당신을 데려가야겠는데요. (언제 그랬냐며 당당해져선 어깨 으쓱인다.) 다 잊어버리셔서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제가 못 꾀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광철:애초에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인데? 언어가 다르니 나도 매번 몸짓이나 뉘앙스로 파악하고 있고,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다.) 아니다, 이거까진 말 안 할래. 아무튼 못 꾀어내는 사람이 없단 명성을 지키기 위해선 괜히 이상한 도전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래도 꼭 보겠다면... 고민은 좀 해볼게.
백지혜:아까부터 숨기는 게 많으시네요, 우리처리? (빤... 히 바라보다 가볍게 웃는다.) 보여드리죠, 이 제가 백전백승 기적의 변호사라 불리는 이유를... (그렇게 안 불린다.) 왜 만나게 하기 꺼리시진 모르겠지만, 걱정 마세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겁니다.
오광철:내가 변호사랑 결혼했었어? 신기하네. (여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경계심은 풀린 듯 손을 잡고 집 방향으로 이끕니다.) 돌아가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너무 무리하진 마. 가자.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합니다.
욕실로 안내받은 뒤 모래와 바닷물을 잘 씻고 나오면 욕실 앞엔 방금까지 입고 있었던 옷이 깨끗해진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벽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면 넓은 쟁반 위에 빵과 얇게 썬 냉육, 석류, 무화과, 올리브와 치즈, 그리고 큰 잔에 가득 담긴 우유 등이 가지런히 올라와 있습니다.
그 앞에서 광철은 한 명분의 식기만이 올라간 테이블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지혜:(깜빡... 일단 반대편 의자에 앉는다.) 이거 제겁니까?
오광철:응. 네 거야. 주방에 안 들어간 지는 꽤 됐지만 상하진 않았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먹어. 혹시라도 입맛에 안 맞으면 (음...) 그건 나도 해결 못하니까 그냥 참고.
백지혜:주방에 안 들어간 지 꽤 됐다니, 그럼 처리는 평소에 뭘 먹고 생활하십니까?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으면 돌아가서 혼난다구요. 그리고 지금도... 같이 안 드시지 않고요. (접시 하나를 네 쪽으로 슥 민다.)
오광철:평소에? (접시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밀어낸다.) ...이것도 자세히 말은 못 하지만 아무튼 굶고 있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다른 사람 먹는 것만 봐도 괜찮으니 먹어. 어서. (포크로 빵과 치즈를 집어 입에 넣어준다.)
백지혜:(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다가 입에 들어온 것 우물거린다. 적당히 씹어 삼킨 후 포크를 가져가 똑같이 빵과 치즈를 집는다.) 먹으면 안 되는 건 아니죠?
오광철:안 되는 건 아니지만, 배고픈 것도 아니면 굳이 먹을 필요 없잖아. 괜히 더부룩하고, 지나치게 배부르면 기분 나쁘고, 움직일 때도 불편하고... 꼭 먹어야 해?
백지혜:뭐... 배부르신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대로 자기 입에 넣고 식사를 이어간다.) 제대로 지내고 있었는지 궁금했던 거니까요. (평소에 대체 뭘 먹는진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나저나 재료도 그렇고, 역시 이국적인 곳이군요.
오광철:제대로 잘 먹고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내 걱정 많이 하네...) 있지. 우리 진짜로 결혼했던 사이야? 그 말이 정말이라고 해도 난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계속 내가 좋아? 왜? 여기가 이국적이라면 우리가 원래 살던 곳은 어땠는데? (책상에 엎드리며 질문 우다다 쏟아낸다.)
백지혜:며칠 동안 찾고 있던 남편을 영문도 모를 곳에서, 심지어 기억을 다 잃었다고 말하는 걸 본 제 입장도 헤아려 주시죠.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으나, 손은 태연하게 석류 몇 알을 집어 먹고 있다...) 예,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생긋 웃으며 다시 제 왼손 약지를 보여준다.) 저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저희가 함께했던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제가 사랑했던 당신의 모습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우다다 쏟아지는 질문에 조용히 우유 든 잔을 네 쪽으로 민다.) 저희가 살던 곳은 처리랑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제가 입은 옷이 더 대중적이고,이렇게 깨끗한 바다는 보기 드문 편이에요. 대신! 높은 건물과 발전한 문화시설, 즐거운 유흥거리와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음식들이 많답니다! (...좋은 건가?)
오광철:(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켜 닦을 만한 것을 찾는다.) 엇. 지금 나 미안해하면 되는 거지? 어떤 심정인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동안 고생했어. (어색한 손길로 머리를 몇 번 쓰다듬는다. 근데 이 사람 멀쩡하게 석류 먹는 거 보면 연기 같은데...) 유흥거리나 자극적인 음식은 좀 궁금한데... 나중에 우리가 함께 보냈던 날들이나 원래 살았던 곳 이야기 더 해줄 수 있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 과정 중 네가 찾던 사람이 내가 아님을 깨달을 수도 있고. (서서히 해가 지고 주황빛 석양이 방 안으로 길게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보다 섬의 주인이 방문하는 게 아마 오늘일텐데... 어떡할래? 진짜 대화할 생각이야?
백지혜:예,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이 사람과 기필코 함께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어주세요. 어차피 처리는 절 사랑했으니 서로에게 윈윈입니다. (뻔뻔... 머리 쓰다듬는 손길을 여유롭게 만끽하고 히죽 웃는다) 못 해 드릴 것도 없죠. 당신은 제가 찾던 사람이 분명하니, 꼭 기억을 찾게 될 겁니다. (제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 말을 이어간다.) 저흰 국가에서 개최한 어느 행사로 만나게 됐는데, 청렴결백하던 제 행실과 능력 있는 언변으로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듣기로 처리는 거기서 제게 반했다고... (거짓말이다.) 아무튼, 행사가 끝난 후 아주 매운 카레를 먹었었는데, 그때 함께 있던 동료분의 반응이 장난아니었죠. 아, 영상 찍어뒀으니까 돌아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같이 카페 가는 것도 즐거워했잖아요. 거기서... (무화과를 집어 든다.) 이런 과일보다 달콤한 걸 잔뜩 먹기도 했고요. (줄줄줄... 한 5분가량은 더 떠들었다.) 엇, 오늘입니까?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말이 안 통한다 해도,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그 섬의 주인이란 사람은 와서 뭘 하는 겁니까? 말도 안 통한다니 대화는 아닐테고, 저택 관리?
오광철:아~ 갑자기 안 미안한 거 같아. 내가 같이 돌아가겠다고 마음먹는 건 앞으로 네 행동에 달렸으니 힘내봐. 응원할게. (잡힌 손을 살살 움직여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이야기를 듣는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미간이 좁아지거나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재미있었겠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동화책 비슷한 걸 듣는 느낌, 나랑은 먼 세계의 이야기다 싶어.
섬의 주인이 와서 하는 일? 나랑 잠시 있다가... 그 이후엔 뭘 하는지 잘 모르겠어. 매번 헤어진 뒤엔 정신이 멍해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나 혼자 남아있으니까. 저택은 굳이 그 사람이 아니라도 항상 관리되어 있으니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 거 같고... (곰곰.) 뭐 하는 사람일까? 오늘 물어봐 줄래?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어느새 해가 다 져버린 방으로 쿵쿵 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립니다.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딱 봐도 2M가 훨씬 넘는 키, 광철이 입은 것과 비슷하지만 이국적인 것이 아닌 처음 보는 양식의 옷차림, 비정상적으로 긴 팔은 무릎에 닿을 것만 같았고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까지 느껴집니다.
궤짝 속에서 화려한 로코코 풍 드레스를 꺼냈습니다. 흰색을 베이스에 중간중간 노란색과 검은색 레이스가 장식으로 들어간 여름용 드레스는 마치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볍습니다.
같이 세트로 꺼낸 작은 티아라까지 머리에 얹어주면 그 순간 당신이 로맨스 판타지 속 주인공! 입혀볼까요?
백지혜:(들고 처리에게 다가갑니다!) 가끔은 기분 전환 겸 갈아입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오광철:나 아직 삐진 거 안 풀렸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옷으로 손 뻗는다.) 줘봐. 입어줄게.
백지혜:삐진 거와 기분 전환은 다른 거죠. (순순히 넘겨주고 또 뻔뻔스레 침대에 걸터 앉는다.)
오광철:(그런가? 듣다 보니 또 그럴싸... 옷 들고 잠시 밖에 나갔다 화려한 드레스로 환복하고 돌아와 등을 보인다.) 일단 입었는데 이거 혼자서 못 입는 옷인 거 같아. 등에 단추 채워줘.
백지혜:알겠습니다. (등 뒤로 다가가 단추를 채운다. 중간까지 채웠을 때쯤, 등의 가운데, 척추 라인을 손으로 꾹 눌러 위로 훑는다.) 5년을 가까이... 입어본 적이 없었나요? 궤짝에 꽤 많은 옷이 있던데.
오광철:(갑작스러운 손길에 반응해 뒤돌아본다. 놀랐는지 크게 뜬 눈.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 먼저 등을 맡긴 건 자신이란 생각에 뭐라 하지 못하고 다시 앞을 바라본다,) ... 입어본 적 없어. 내가 봤을 땐 항상 다 비슷한 옷들만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냥 안쪽까지 살피지 않았던 것일지도.)
백지혜:(놀란 것 같은 눈치에 두 손을 떼고 눈매를 접어 완곡히 눈웃음 짓는다. 별말 없이 다시 앞을 보자, 천천히 단추를 채워 올려간다. 마지막 단추까지 고정한 뒤, 다 됐습니다. 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이렇게 잘 어울리시는걸요! 머리도 다시 만져드릴까요? 꽤 자신 있습니다.
오광철:잘 어울려? 볼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네가 보기에 괜찮다면 상관없는데...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살피다 어색하게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자 가벼운 재질의 드레스가 공중에 떴다 천천히 내려온다.) 이왕 하는 거 머리도 해줘. 자신 있는 거 보면 결혼 전에 만났던 사람도 많은가 봐? (땋았던 머리를 풀고 다시 뒤돈다.) 이번에도 이상한 짓 하면 다신 대화 안 할 거야.
백지혜:그럼요! 광철은 원래 화려한 옷을 즐겨 입기도 했고, 확실히 어울리기도 했으니까요. 원래 입고 있던 옷도 나름 잘 어울렸지만, 저는 이쪽이 더 취향입니다. (드레스 끝을 잡아 가지런히 정리해 주곤, 곧바로 머리카락을 풀어 손으로 빗어낸다. 잠깐 고민하다가 양 갈래로 나눠 아래로 땋아낸다.) 많진 않고 한 명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길진 않았지만, 종종 대신 손질해 드렸었거든요. 그리고, (아주 잘! 은 아니지만 훨 정돈된 형태로 땋아 정리한다.) 이상한 짓이라니, 부부사이에... (습관처럼 머리 위에 입 맞추려다 멈칫해 발걸음 뒤로 물린다. 대신 탁자에 둔 엉성한 화관을 가져와 머리 위에 올려둔다.) 제 화해 요청의 뇌물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오광철:내가 원래도 화려한 걸 좋아했다고? 그래서 몸에 낙서가 많이 있었구나. (다리 쭉 뻗어 문신을 확인한다. 궁금했던 게 하나 풀렸네.) 말하는 것만 보면 사람 10명은 사귀어 본 사람 같은데 이건 좀 의외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머리 길이는 어느... 앗. (질문하다 머리 위에 올라온 화관에 막힌다. 이어 두 손으로 화관을 집어 확인하더니 엉성한 화관의 형태에 웃음을 터트린다.) 뭐야 이거. 바보 같아. 하지만... (다시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려놓고 뒤로 체중을 실어 품에 기대고는) 나 신경 써서 만들어준 거지? 그럼 마음에 들어.
백지혜:상처 같은 건 안 궁금하십니까? 인천 일대를 휘어잡던 한 청년의 18대 1, 대승의 신화를 들려드릴 수 있는데. (능청 부리며 어깨 으쓱인다.) 나머지 이야기는 기억 되찾으신 후에 들려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시죠? 힘내서 찾아보자구요! (엉성하게 엮은 화관 보며 웃음 터트리는 모습에,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순전히 웃는 게 보기 좋아서 입 끝을 살짝 올린다. 마주 안아 어깨에 얼굴을 묻곤 천천히 뺨 문지른다.) 엄청 신경 썼습니다. 어느 꽃이 더 활짝 폈고, 색이 진한가 봐가면서요.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조금 후에 몸을 떼곤, 잠깐 머뭇거린다. 이어 태연하게 묻는다.) 그나저나 반지 같은 건 착용 안 하십니까? 아까 상자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더군요.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일 텐데, 의아해서 말이죠.
오광철:그냥 다친 거라고 생각해서 여태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궁금한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그 사람이 맞단 확신이 없어서. 기억을 되찾은 뒤 들려주겠단 말에 대한 대답은 적당히 웃음으로 넘겼다.) 신경 써서 만든 게 이거야? 나도 손재주는 영 별로인데 우리 앞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하지 말자. (기댄 쪽 팔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고 떨어진다.)
반지? (방금까지 웃던 낯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표정이 굳는다. 변명할 거리를 고민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나온 말들은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말들뿐이다.) 그냥... 취향 아니야. 그리고 불편해. 싫어.
백지혜:엇, 너무하신데요. 이럴 땐 앞으로 잔뜩 만들어서 실력을 늘려줘~ 언젠가 완벽한 화관 만들어줘~ 라고, (누군지도 모를 애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 하는 거랍니다. (장난스럽게 생글생글 웃고 있다, 네 표정이 일순 확 굳어지자 당황한 듯 눈썹 끝을 삐죽 올렸다 내린다.) 취향이 아니다... 불편하시군요? (확실히 광철은 종종 빼놓고 있었고, 사라졌던 날도 내가 다시 끼워주곤 했다만. 뭔지 모를 이질감이 거슬려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를 손톱 끝으로 긁어낸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 끄덕인다.) 옷도 다 갈아입으셨으니 좀 더 앉아 계세요. 전 이쪽을 털- 구경하고 싶으니까! (광철 앉히며 자연스럽게침상살펴봅니다.)
오광철:완벽한 화관을 만들기 전에 꽃밭이 다 털릴 거 같아서 안 부탁할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하는 말을 짧게 마친 후 앉아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된 대리석 침대 위에 푹신한 이불과 캐노피를 둘러 만든 침대입니다. 항상 광철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백지혜:그 정도로 저주받진 않았어요. (이어서바구니도 살펴봅니다!)
체격이 큰 성인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바구니입니다. 나무로 성기게 짜여있지만 꽤 튼튼합니다.
더러워진 시트나 옷가지 등을 벗어두는 용도로 쓰는 것이 하나, 여분 쿠션 등을 담아 두는 것이 하나 보입니다.
나중에 숨을 필요가 있다면 이 안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여분 쿠션으로 몸을 숨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백지혜:(불안감을 조성하는 스트립트가 머리 위를 스친 거 같은 기분이... 아까부터 신경쓰인향로도 살펴봅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향로입니다. 안쪽에서 무언가 타고 있는지, 은은하고 달작한 향기가 방 안을 넘실거립니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과일 향기 같은 느낌입니다.
(밤낮으로 법전을 읽었던 거 같은 기분이...) 무슨 언어인진 잘 모르겠군요. (일부가 파손된 점토판도 살펴봅니다.)
아랫부분이 깨져 있습니다. 온전한 내용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역으로 일부분뿐이기 때문에 다른 점토판에 비해서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파손된 점토판핸드아웃 공개합니다.
백지혜:나름 일리가 있는 문학적인 얘기군요.
다 둘러본 거 같으니 내려갑시다. 먼저 가세요!
오광철:그래? 나는 잘 모르겠어. 형은 똑똑한 사람이구나...
(천천히 줄사다리 타고 내려오다가 3칸 정도 남았을 때 뛰어내린다. 착지...)
백지혜:음... (고민하다 줄 사다리 정리하고 그냥 뛰어내립니다!)
오광철:저거 그냥 정리해도 돼? 나중에 또 가야 하면 어떡해?
백지혜:뭐라도 찾아서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요? 정원에 포도나무가 실하던데.
오광철:포도나무 베어서 여기까지 들고 오게? (빤히...) 알아서 해.
여기 다 털었으면 다음은 어디 털어볼 거야?
백지혜:다음은모래사장으로 가죠!
오광철:거긴 별거 없겠지만... 가자~
저택에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 눈을 떴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택에서 5분만 걸으면 바로 해안선에 도착하고, 해안선을 따라 쭉 걸어도 30분 내로 섬을 전부 둘러볼 수 있습니다.
섬을 한 바퀴 돌며 수평선을 암만 바라보아도 배 한 척, 지나가는 갈매기 하나 없이 에메랄드빛 바다만 멀리 이어질 뿐입니다.
백지혜:정말 깔끔한 모래사장이군요. (발로 툭... 모래를 차다가 바다 지평선 끝을 가만히 바라본다. 배를 타고 가도 나갈 수 있겠다는 기분은 안 들고...) ... 저희가 같이 살던 곳도 바닷가 옆이었습니다!
오광철:그럼 바닷가 옆에 커다랗고 높은 건물들이 많이 있었단 거야?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이야?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 꼬불거리는 선 옆에 직각으로 그어진 길쭉한 선...?)
백지혜:대충 그런 셈이죠! 그렇게 가깝진 않고 조금... (노래사장에 쭈그려 앉아 직각 선들을 모래로 덮어 지우고, 더 떨어진 위치에 다시 그려준다. 한 곳에 화살표로 하트를 그려두기도...) 이런 느낌입니다. 여기보다 훨씬 시끄럽고, 사람도 많아요. 배들도 다니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던져버리고...
(모래사장.......)
오광철:(그림이 고쳐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 하트는 뭐야? 여기에 뭐 있었어? (고민하며 하트 옆에 동그라미, 별, 세모, 네모 등 무언가를 더 그려본다.)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이면 정신없을 거 같아.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던지는 건 기대되기도 하고... 형은 직접 던져본 사람 있어? 지금 던지고 싶은 사람은?
백지혜:저희가 살던 곳이라는 표식입니다. 덕분에 한껏 귀여워졌군요! (낙서가 마음에 드는지 모래사장 위로 웃는 얼굴을 그려 넣었다..) 확실히 정신없고, 예쁜 바다라는 느낌은 아니었죠. 그래도 그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느끼는 시원한 밤바람을 좋아했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도 저에겐 참 소중한 곳이에요. 광철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직접 던져본 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불법인지라. 지금 던지고 싶은 사람은 몇 떠오르긴 하는군요...
오광철:저렇게 높은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근데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가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니까? 너무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면 나중에 만날 네 남편에게 미안하잖아. 하지 마. (웃는 얼굴 끝에 삐죽 올라간 속눈썹을 그린다. 닮았어.) 돌아가고 싶은 곳인진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한 번쯤 가보고 싶긴 해. 사람이 많은 장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니까 길 잃지 않게 도와줄 거지?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경험담인 줄 알았는데... 직접 던져본 적이 없다면 주변인이 대신 던져줬나. 아니면 그냥 상상만? (던지고 싶은 사람... 역시 마법사? 바다에 빠진 마법사를 추가로 그려본다.)
백지혜:아니라면 그게 더 신기한 경험일 겁니다. (너무나 현실 같은 꿈에서 그와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성향까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니. 어쩌면... 광철이 너무 걱정되어서, 보고 싶어서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 걸까? 고작 며칠 안 봤다고...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거라면... 정신 차리고 현실에서 그를 찾는 게 옳은가? 무수한 혹은, 어쩌면 같은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간다.. 점차 나빠지는 안색, 식은땀이 흐를 때쯤 고개를 저으며 모래사장에서 일어난다.) 광철은 말없이 절 떠나거나 하지 않아요...
...돌아가게 된다면 저보다 더 익숙하게 다니실걸요! 물론 도와드리는 일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바다에 그려지는 기이한 형체... 를 바라보다 네게 손 내민다.) 슬슬 일어날까요?
오광철:그 정도로 닮았어? 신기하다.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드레스 소매로 식은땀을 닦아준다.) 형 남편은 좋겠네.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떠나지 않는다고 확신도 해주고. (아,) 혹시 방금 말한 광철은 남편이 아니라 나한테 한 말이야? 이름이 같으니 헷갈리네... 이 섬에선 내가 형을 두고 떠날 곳도 없는데 너무 걱정하는 거 같아. (이어 머리 위에 있던 화관을 들어 네 머리 위에 얹어준다.) 지금 기분 안 좋아 보여. 난 이거 받았을 때 기뻤으니까 그대로 돌려줄게.
가자. 다음은 어디 가보고 싶어? 내일은 마법사가 돌아오는 날이니 다음에 가는 곳이 이번 주의 마지막 산책이 될 거 같아.
백지혜:(부드러운 천의 촉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자, 평소의 그와 다른 점이 눈에 확연하다. 조금 더 차분한 표정이라거나, 자신이 모르는 특이한 분위기라거나. 그것들은 미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다른 점이 있더라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광철이 맞다고. 우리가 함께할 미래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렇게 믿어야만 진정이 됐던 탓인진 몰라도... 한결 나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 위에 화관이 쓰였을 땐 작게 웃음도 터트린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한테 어울립니까?
그럼꽃밭으로 가죠.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오광철:음... 아니. 안 어울려. (다시 화관을 챙겨 자기 머리 위로 올린다.) 형의 검은 머리엔 지금 내가 쓴 것보다 더 단정한 꽃이 어울릴 테니까 내가 직접 만들어줄게.
걸음을 옮겨 꽃밭에 도착합니다. 한가득 피어있는 여름 꽃과 새 욕조, 정자, 연못이 저번에 봤던 그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광철:가끔 기분 전환으로 이 꽃밭에서 낮잠을 잘 때도 있어. 햇볕이 따뜻하잖아.
백지혜:저기 정자에서요? 확실히 자면 좋은 꿈을... (곰곰...) 꿈을 꾸십니까?
오광철:정자에서도 자고, 꽃밭 한가운데 누워서도, 한 번은 저 연못에 몸을 반 정도 담가놓고 잔 적도 있어. (추워서 금방 깨버렸지만...) 꿈은 그냥 평범하게 꾸는데? 음... 가장 최근엔 마법사 님과 형이 주먹다짐을 하는 꿈을 꾼 거 같아.
백지혜:그렇게 자면 감기 걸립니다.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가볍게 웃는다. 그러고 보면... 질병도 안 생기는 건가? 뭘 먹는지도 모르겠고, 그 마법사란 사람이 뭘 하는지도... 생각하니 기분 나빠져 고개를 젓는다.) 누가 이겼습니까? (손으론 꽃을 몇 송이 따 천천히 엮어간다.)
오광철:이렇게 지내면서도 나 아픈 적 없었는데... 감기 걸린 적 없어. 형은 감기 걸린 적 있어? 약해 보여서 금방 다치고 아플 거 같아. (꽃을 따던 손을 멈추고 그대로 이마에 손을 얹어본다. 일단 지금은 건강한 거 같은데.) 형이 졌어. 마법사가 또 이상한 주문을 외우니 3초 만에 슝~ 하고 또 사라졌지 뭐야. 다음엔 덤비지 마. (다시 꽃으로 손길을 옮긴다. 서로 다른 흰색 꽃 몇 송이를 들고 뭐가 더 어울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
백지혜: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어디 아프진 않을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를 가장 걱정했었으니까요. 물론 확인했다고 안심해서 돌아갈 건 아니지만요! 앗. (이마에 손 올려지자 눈 깜빡인다. 이어 들린 말에 손 닿았던 이마를 매만지며 답한다.) 저 그렇게나 약하진 않습니다. 원래 살던 곳이면 누구 하나 쉽게 저한테 덤비지도 않는다구요! 싸워도 (언변으론) 제가 이기고요. (꽃 들고 고민하는 거 보다가 슬쩍 하나 가르켜 추천해 준다..) 예,예... 확실히 알아봐야 할 것도 있으니... 얌전히 있겠습니다.
오광철:애초에 마법사 님에게 당하는 거 외에 돌아가는 방법은 알아? 형도 나랑 같이 여기에 일주일 동안 있는 중인데... (투덜거리며 추천받은 꽃과 같은 종류들을 모아 천천히 엮는다.) 형이랑 싸워도 지는 거 보면 그쪽 사람들은 다 약한가 봐. 형이 기억을 잃기 전 나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18:1로 싸워서 이긴 이유를 알겠어. (건성으로 대답하며 마저 꽃들을 연결해 보면... 결과물은 당연하게도 엉망! 뒤늦게 수습하려는 듯 연노란색 꽃을 하나 꺾어 장식하곤 보지 못하게 바로 머리 위에 얹고 말을 돌린다.) 알아볼 거? 뭐가 궁금한데?
백지혜:모르죠. 그러니 그 마법사 님에게 안 당하도록! 잘 숨어있겠단 말이었는데. 적어도 원하는 걸 알아내기 전까지 말입니다. (꽃 엮어내는 것 가만히 구경하며 정원을 둘러본다. 이곳을 볼 때마다, 완벽하리만치 살기 좋게 만들어 뒀다는 감상만 거듭 남는다. 광철을 붙잡아 두며 뭔가 해야 할 게 있는 건가? 목적을 알아내면 약점도 보이는 게 당연지사. 뭐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생각의 파도에 잠겨 유람하고 있을 때, 머리에 화관이 툭 올려지고 나서야 다시 널 바라본다,) 그건 광철이 강해서가 맞아요. (작게 속닥이곤 머리 위로 손 뻗어 화관을 살짝 건드린다.) 당연히 광철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방법, 그리고 함께 돌아가는 방법입니다. ...설령 당신이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기억을 되찾으면 좋잖습니까. 찾은 김에 지루한 곳에서 나가기도 하면 더 좋고!
오광철:안 당하도록 잘 숨어있을 수 있지? 저번처럼 또 1년 사라져 있지 말고... 곧 해가 지면 마법사 님이 올 텐데 어디 숨어있으려고? 생각해둔 곳 있어? (집에 숨기 적당한 곳이 있던가 고민하며 몇몇 곳을 읊어본다. 정원의 수풀 뒤, 주방 위쪽의 공간, 목욕탕에서 봤던 다락?) 내가 강했다고? 더 믿기지 않는데... 진짜 나 아닌 거 아냐? (고개 천천히 젓는다.) 형이 찾는 사람이 내가 아니면 기억은 건들지 말고 혼자 떠나줘. 여기서 지내는 삶도 나쁘지 않으니 굳이 어딘가로 떠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마법사 님이 날 찾을 거 아냐. 작년에 형이 날 데리고 뒷걸음질 치기만 했어도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인데.
백지혜:이 저택은 또, 수상하게도 비밀 공간이 많더군요. 처리의 방에 있는 아주 큰 바구니고 꽤 괜찮을 것 같고요. 주로 거기서 보는 거 아닙니까? 아니더라도 뭐, 몸 하나 숨길 곳은 있겠죠. (태연하게 답했으나, 해가 저물어갈수록 조금씩 긴장하는 티가 역력하다. 들키지만 않으면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없겠지. ...만일 깨어난다면, 그래서 또 나 없이 1년을 보내게 된다면... 데려가는 일이 더 힘들어질 것만 같다.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 섬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좋으십니까? (한동안 말없이 널 응시한다. 이번엔 웃음기 섞인 숨이 거칠게 뱉어진다.) 지금 당신이 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라구요. 어쩌다 이런 곳에서 홀로 지내게 된 줄도 모르시면서, 보이는 것에게 너무 쉽게 정 붙이지 마십쇼... 안 좋은 습관입니다, 그거.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간 억양에 스스로 놀라 입가를 가린다.)
오광철:(시선을 내려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크게 한숨 내쉰다.) 형이 방에 숨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거 보면 생각 바꿀 마음은 없는 거지? 알겠어. (날카로운 억양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눈가에 웃음이 걸린다. 누군가에게 걱정 받는 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구나.)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아. 이러나저러나 몇 년 동안 이 섬에서 나랑 있어준 사람이 마법사 님이라는 건 바뀌지 않는걸. 하지만... (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떨어진다.) 몇 년 동안 마법사 님과 함께한 시간보다 지금 형과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긴 거 알아? 누구 말대로 보이는 것에게 쉽게 정붙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 해가 지고 있어. 슬슬 돌아갈까?
백지혜:(가볍게 닿고 떨어지는 감촉에, 순간 숨을 들이키며 일어선 네 손목을 붙잡는다. 아무런 말 없이 잡고 있는 것만 몇 분, 해가 지고 있다는 말에 다시 숨을 내쉬고 손을 놓는다. 입을 달싹여 뭔가 말하려다 끝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기다란 마법사의 손가락은 처음 접하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제대로 벗겨내지 못하고 허공에 헛손질만 반복합니다.
몇 번 그러다가 포기한 듯 남자는 치마를 대충 걷어올리고 그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모습이, 남자의 커다란 손이 안을 헤집는 소리가,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숨소리가 겹겹이 방 안에 쌓여갑니다.
계속 지켜보기 힘들다면 이대로 눈을 감아도 괜찮고, 뛰쳐나가 남자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괜찮고요.
어떻게 하시겠나요?
백지혜:(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봅니다. 그림자가 겹쳐지는 과정, 불쾌한 소음 같은 움직임, 익숙하다기엔, 너무 낯선 그 숨소리들을.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며칠 만에 만난 사랑스러운 연인인걸요. 게다가, 제대로 봐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무언가 실마리라도 하나 잡아내야죠. 무얼 위한 일인지, 어떤 필요성이 있는지... 침착하게 목적을 곱씹어봐도 가구가 끼익, 하며 움직이는 소리에 호흡이 멈추고 덩달아 심박수가 커집니다. 그런들 달리 몸이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니...)
백지혜:(주방의 소리를 듣고 나서도 몇 분간 굳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야, 누구라도 그런 행위를 본다면, 능숙하게 다른 사람들 받아들이는 연인을 보고 태연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아니, 연인의 모습을 한 사람... 어쩌면 정말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혹은 이상해진 뇌가 만들어 낸 허구라던가. 그런 단어가 또 몇 개나 스쳐 가고 나서야 턱 막힌 숨이 풀린다. 간헐적인 기침을 하고, 발작하듯 바구니 안에서 허우적대다 꼴사납게 뛰쳐나간다. 소리가 들렸던 주방을 지나쳐, 큰 소리가 들렸던 안뜰로. 무언가 찾을 기색도 없이 기계적인 호흡을 반복한다. 송글 맺힌 땀방울이 바람을 맞아 식어간다.)
바닥에 있는 잔디를 자세히 살피면 방금 막 밟혀 꺾인 잔디가 발자국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이어진 발자국은 분수 앞에서 끊겼습니다.
백지혜:(...분수를 부수면....)
분수를 부수기에 적당한 도구는 보이지 않는걸요. 아마 몸이 먼저 부서질 겁니다...
백지혜:(분수의 표면을 잠시 바라보다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돌립니다. 중앙의 방으로...)
방에 돌아오면 멍한 상태로 침상 위에 앉아 눈을 깜빡이는 광철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은 인기척을 느낀 곳으로 향하고, 몸을 일으켜 당신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옵니다.
오광철:어디 갔었어... 나 씻을래. 도와줘.
백지혜:(다가오는 걸음에 잠깐 주저했지만, 곧바로 부축하며 목욕탕으로 걸음 옮긴다.)
오광철:(부축하는 손길에 온몸을 맡기고 따라간다. 계속해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자 머리를 세게 흔들어도 곧 졸음이 몰려오는 듯 반쯤 감긴 눈을 손등으로 비비다 급히 변명한다.) 아냐, 나 괜찮아... 안 졸려. 씻을 수 있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점점 느려지는 걸음. 그러다 우뚝 멈춰 서더니 등 뒤로 손을 돌려 단추를 풀려고 한다.) ... 불편해.
백지혜:(옆에서 머리 세차게 흔드는 움직임 덕에 오히려 이쪽이 정신이 들어 부축하는 손에 힘을 강하게 준다.) 괜찮습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시죠. 질질 끌어서라도 옮겨다 드릴 테니. 뒤처리 정도는... 능숙하니까요...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 내디딘다..) 가서 벗겨드릴 테니 조금만 더 참아요.
오광철:가서... 싫은데. 지금이 좋아. (몇 번 더 시도하다 포기한 듯 얌전히 팔을 내렸다. 이어 집중해야 들릴 만큼 미세한 목소리로 '부탁해'라 답한 뒤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도착하면 깨워. 그리고 절대 빼면 안 돼... 절대로... (이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체중을 넘긴다. 부축에 기대 걸을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어서 질질 끌어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인가...)
백지혜:...뭘, (되물으려는 찰나, 완전히 실린 체중에 다시 호흡을 깊게 들이쉬고 걸음 옮긴다. 이상하게 저쪽이 정신을 잃자 이쪽은 이성이 뚜렷해진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섬의 주인이란 것, 와서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에 관한 기억이 안 난다는 것 치고 매우 능숙하게 받아들이던 제 남편... 의 모습인 상대. 아니 뭐. 아침에 되면 기억에서 잊힐 가능성도 있겠지. 거짓말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생각해보면 섬에서 처음 조우한 뒤부터 수상쩍은 부분이 여럿 아니었던가. 아무튼, 제쳐두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긴 팔을 타고 흐른 기체 같은 건 정확히 기억한다. 그걸... 마셨던가? 어쨌더라. 그리고 주방에서 난 달그락 소리. 아마 꿀을 사용한 것 같은데... 다음엔 주방에 숨어들어 있어야 하려나. 생각을 다 정리하니 타이밍 좋게 목적지에 다다랐다.. 어깨를 흔들어 의식 체크한다.. 어차피 정말 깨울 의도는 없어서 말을 걸진 않았지만...)
오광철:(흔드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뜬다. 초점 없는 눈을 깜빡여 애써 정신을 차리고자 애쓰곤 입을 가린 채 길게 하품을 했다.) 벌써 왔어? 고마워... (잠깐 눈을 붙였던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정신이 맑아져 휘청이면서도 혼자 걸을 수는 있는 상태로 보인다.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까먹고 그대로 탕에 풍덩 들어가 버린 것만 빼면 멀쩡한 상태로 보였을 텐데... 물을 먹어 무거워진 드레스 자락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건져 올리다가 곧 포기한 듯 탕에 입까지 푹 들어가 버린다.) 몸이 무거워... 왜지? 오늘은 왜 옷 입고 있지... 마법사 님 변덕쟁이...
백지혜:음... 아, 일어나셨습니까? 그냥 그대로 쉬고 계셨어도... 어어~ (걸어가는 널 따라 고개가 돌아간다. 풍덩, 소리에 시선을 잠깐 다른 곳에 뒀다가, 이어 들려오는 의아하단 뉘앙스에 가벼운 한숨을 쉰다. 탕 앞까지 가서 적당히 앉아 몸을 걸치고 어깨를 끌어온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계시죠. 저도 이 상황에 웃음까지 터트리고 싶지 않으니까... (빈정거리는 톤으로 윗단추부터 섬세히 풀어나간다.)
오광철:왜 웃으면 안 돼? 웃음이 나오면 그냥 웃어야지... (단추가 풀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수면을 바라보던 중, 수면 너머로 눈이 마주치자 뜬금없이 웃기 시작한다. 소리 내어 크게 웃다가, 숨죽여 큭큭거리다가, 익숙한 히죽 웃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을 마주 본다.) 나 지금 기분 좋아. 지금 엄청 배부르고, 멍하고, 졸린 데다가 오늘은 혼자도 아니야. 이거 진짜 좋아... 이대로 세상이 멸망해도 좋을 거 같아.
백지혜:이상하네, 저랑 했을 땐 이런 반응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정말로 다른 사람인가? (시선을 가만 내리깔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데 열중한다.. 크게 들려온 웃음소리에 덩달아 짧게 웃는다. 이쪽은 기가 차서 그런 거지만. 고개 젖힌 너와 잠깐 시선 맞추다가 입 비죽 내밀며 볼 꼬집는다.) 저랑 기분이 정반대입니다. 전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면 억울해 죽을 것 같은데! 배도 고프고 정신도 또렷합니다. 제대로 벗기게 몸이나 돌리시죠.
오광철:말했잖아. 형 남편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때? 많이 달라? (익숙한 듯이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볼 주변에 붙인다.) ... 아, 웃었다. (자신의 웃음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웃음이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는지 볼이 꼬집혀도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왜 억울해?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형도 할래? (농담조의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어 느릿하게 몸을 돌리고 팔을 내밀더니 대화 주제가 한 번 더 바뀐다.) 나 근데 이제 진짜 졸려... 어떡하지.
백지혜:예에... 꽤 많이 다릅니다. 역시 사람은 부딪혀 봐야 실감을 하나... (내뱉는 말과 달리 목소리 톤이나, 익숙한 행동이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올라가는 눈썹이며 온통 신경 쓰여 죽겠다는 티가 팍! 난다. 다른 사람이다, 모습만 같을지 모른다고 되뇌어도 자신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취약한 정신이 얄팍하게 깔아둔 자기 보호 같은 거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출해도 이 상대가 그걸 잡아낼 실력이 없단 것이다.) 저 바람피우면 제 남편이 화내거든요? 안타깝게 됐습니다. 저도 당신이랑 안 할거고, 세상도 멸망하지 않을 거라. (사기꾼으로 있던 시절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빠른 상황 적응 능력과 재치로 둔갑한 셀프 타격. 적어도 남이 후벼파는 것보단 훨 낫지... 물에 젖은 옷을 서툴게 벗겨내며 아래로 주욱... 내린다.) 대충 씻으면 나중에 찝찝하실 텐데요. 빼지 말라더니, 그런 게 좋은 타입?
오광철:내가 그 사람과 많이 달라서 다행이다. 적어도 이제 형이 혼자 심란해할 일은 없을 거 아냐. (5일과 5년은 정말 큰 차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써 그 생각을 티 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붕 떠있는 기분은 무심코 속내를 털어버리게 만들어 여태 가장 신경 쓰였던 점을 입 밖에 꺼내게 된다.) 형이라는 거 그 사람과 정했던 애칭이라며. 남편이 아닌 내가 계속 불러도 돼? 이름 알려줘. 남편이 바람피우면 화낸다며. 빨리~ 안 하기로 해놓고 이름도 못 알려줘? (거추장스러운 옷이 벗겨지자 다시 한번 졸음이 쏟아지는 듯 하품을 하고 한 박자 느려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응? 어... 찝찝한 건 싫지만 빼면 안 되니까? 아마 죽을걸...? 아닐 수도 있고... 해본 적 없는데...
백지혜:(유감인 일이다. 백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많이, 오광철이 내뱉는 어절 하나하나에 심란해 이 감정으로 원자력을 돌릴 지경이었으니. 툭 내뱉어진 속내에 옷을 끌어 내리는 손길이 멈춘다. 주변을 잠깐 살펴보다 샤워 타올 같은걸 가져와 탕에 푹 담구고, 다시 쭉 짜내어 곱게 개더니 그걸로 몸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닦아낸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특별한 호칭도 아니지 않나... (거의 넋이 나간 그 움직임은 기계보다 딱딱했다. 참으로 천진난만한 입이 죽음을 혀에 올려놓자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기댄 몸을 일으킨다.) 장에서 정액을 뺀다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아... (그 오광철이 하는 말이니 파렴치한 진실인지, 이 순진한 도련님이 엉뚱한 말에 속아 굳게 믿고 있는 건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반만 빼볼까? 아니, 반만 빼두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애초에 들어있는 게 사람의 것은 맞을까? 배부르다고 하는 건 또 뭐였어. 누가 식사를 뒤쪽으로 하는데! 그가 탕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어느 누구에겐 아주 긴 밤이 지나갔더랬다. 5일과 5년의 격차를 채워버릴 만큼의, 시간과 정신의 방에.)
..............................이제 주무시러 가시죠? 아침 해 여기서 보고 싶은 거 아니면...
백지혜:(괜히 거슬리니까 양탄자나 탈탈 털어봅니다. 밑에 깔린 건 없나... 포도나무 줄기도 한 번 살펴보구...)
양탄자를 들어보자 아래에 깔린 흙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무뿌리 주변, 한곳만 유독 파헤친 것처럼 흙이 뒤집혀 있습니다.
백지혜:(최근에 생긴 흔적인가? 신경쓰이니 그 주변 흙을 파헤쳐 봅니다.)
흙을 조금 파내자 그 속에서 쇠로 만들어진 상자 하나가 나옵니다. 정면에는 열쇠구멍이 있고, 가로 세로 30cm에 높이는 10cm쯤 되어 보입니다. 특별한 문양이나 장식은 보이지 않습니다.
백지혜:(열쇠로 여는 상자... 광철이 묻었나? 아니면 그 숲의 주인? 허술한 거 보니 광철일 것 같기도.) 다른 사람의 비밀을 털어내는 것 만큼 즐거운 일이 없죠. (열쇠는 어딨을까. 괜히 상자 한 번 흔들어 봅니다.)
상자를 흔들면 안에서는 부드러운 천 같은 것이 둔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백지혜:(옷 같은 게 들었나... 잠깐 고민하다 옆구리에 끼고 다시 흙을 대충 묻어 양탄자로 정리합니다. 혹시 여기서 열쇠공을 해본다면?)
열쇠공
기준치:
1/0/0
굴림:
54
판정결과:
실패
상자는 열릴 생각도 없이 멀쩡합니다... 양탄자를 덮자 주변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웬만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거 같습니다!
백지혜:(여긴 둔감한 사람들 뿐이니 괜찮아. 한껏 방심하고 다니는 백지헤다... 생각해 보니 어제... .................................에서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침상에 떨어져있지... 않으려나? 없을 경우는 상상하기 싫으니 확인하고나 보자...중앙의 방으로 걸음 옮깁니다!)
중앙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침상 위에서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는 광철을 제외하면 방은 평소와 똑같은 상태입니다.
오래 열어보지 않았던 듯 불쾌한 금속 마찰음을 내면서도 열쇠는 상자에 딱 맞게 끼워져 돌아갑니다.
상자를 열어보면 그 안에서 사라지기 전날 광철이 입고 있었던 잠옷이 나옵니다.
백지혜:(반지는 지붕 위에, 옷은 양탄자 아래에 상자로 보관까지... 이렇게나 신경 쓴 티를 내면 꼭 입혀달라는 것 같지 않은가. 중요한 건 언제 입혀둬야 좋을지. 마음 같아선 다시 그런 밤을 구경하고 싶진 않지만 ...확인해 보면 명확해지지 않을까? 게다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기분 좋아했었고. ...잠옷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는 그를 한 번 흘긴 후 다시 곱게 개어 옷장 한구석에 넣어둔다.)
(...옷장에 넣어둔 옷 다시 꺼내서 팔에 얹어두고 침상에 걸터앉는다. 자는 광철에게 손 뻗어 앞머리를 매만져 정리하다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흔든다. 어느 아침과 다를 것 없던 풍경에 습관 같은 웃음이 나온다.) 광철, 일어나 주세요. 아침입니다.
오광철:벌써 아침이야...? (누운 채 눈만 깜빡거린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이불의 무늬를 감상하다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좋은 아침... 나 2시간만 더... 아니다. 같이 자자... (어깨를 흔드는 손을 양손으로 붙잡아 가볍게 당긴다. 잠이 덜 깨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당긴 게 다 그렇듯 얼마 당기지 못하고 놓쳐버렸지만...)
백지혜:광철? 철아? (네가 이불 무늬를 구경하는 와중에도 계속 이름을 부른다. 그런 노력이 헛되게도 픽, 쓰러지는 몸을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다. 여기 있는 동안 누가 못 자게 하기라도 했나... 이런 점은 왜 변하지 않을까. 자는 모습을 조금 더 구경하다 침상에 몸을 좀 더 걸친다.) 일어나지 않으면 후회하실걸요. (입 끝을 비죽 올려 웃곤 얼굴을 텁, 잡는다. 그대로 볼을 꾹 눌러 입이라도 맞추려는 것 마냥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닿기 직전, 그대로 고갤 돌려 대신 귓가에 입을 붙인다.) 마법사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저 무서워요. (소곤소곤...)
오광철:(이름을 부를 때마다 웅얼거리는 소리로 응, 응... 하는 대답을 한다. 침상에 사람 한 명의 무게가 추가되며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다가, 얼굴이 붙잡히자 천천히 눈을 뜬다. 아직 밝은데...) 마법사 님은 밤에만 오니까 다음에 거짓말할 때는 시간 확인하고 해... (하지만 덕분에 잠은 깼는지 몸을 일으켜 앉고선 똑같이 귓가에 입을 붙였다 떨어진다. 작은 복수!)
백지혜:이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거잖습니까. 다른 건 잘도 속고 사시면서, 자기 분야 하나는 역시 철저하시네요.(결국 눈을 뜨자 만족스레 큭큭 웃는다. 이내 제 귓가에 닿고 떨어진 온도감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뚝 끊겼지만, 입가는 여전히 빙글 휘어져 있다. 이건 딱히 복수할 만한 일도 아닌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잠옷 한 벌을 들어 네게 잘 보이게 들고 있는다.) 그보다 이것 좀 보십쇼. 당신옷장에서 또 다른 옷을 찾아왔습니다.
오광철:나 속고 산 거 없는데... 마법사 님이 몇 년 동안 하던 걸 갑자기 바꿀 리 없기도 하고. (엄청 커다랗고 길쭉한 사람이니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는 걸까. 그래서 밤에만... 그런 생각과 함께 가지고 온 잠옷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상하다. 형이 온 뒤로 내 옷장 안에 처음 보는 옷이 왜 이렇게 많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별다른 의심 없이 팔을 내민다. 이 섬은 모든 게 새로운 게 당연한 곳이니까.) 입혀줘. 나 아직 졸려서 처음 보는 옷을 제대로 입을 자신 없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임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백지혜:원래 속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당했다는 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이 사랑스러운 점이기도 하죠. (어깨를 으쓱이고 태연하게 말 이어간다.) 제가 이 섬에 온 것도 상당한 이변이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 외에도 섬에 온 사람이 있던 건 아니죠? 그러니까 마법사님이 낮에 오든, 처음 보는 옷이 생기든... (급한 대로 둘러뒀던 겉옷을 벗기고, 능숙하게 잠옷을 펼쳐 상의부터 입혀준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가며 숙인 고개에 시선만 위로 올린다.) 이상할 일은 아닐 겁니다. 어떤가요? 이번 옷은 꽤 편하지 않습니까?
오광철:(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사랑스럽다니 참 취향 이상한 사람이다...) 그럼 형의 남편이란 사람은 매일 속고만 살았나 봐. 결혼도 사기 결혼이었던 거 아니야? (농담...) 상당한... 까지는 아닐지도 몰라. 내가 만난 건 형이 유일하지만 방에서 자는 사이에 떠밀려 왔다가 다시 파도가 데려간 사람이 하나쯤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생각해 줬으니 앞으론 혹시 모를 이변을 경계하며 살아볼게. (타인이 옷을 입혀주는 건 분명 이번이 처음인데도 왜 익숙할까, 이 섬에서 봤던 모든 옷들이 자신의 몸에 딱 맞았지만 왜 이 옷은 유독 특별한 느낌이 드는 걸까... 미묘한 의화감에 인상을 쓰곤 옷소매만 노려본다.) 편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
백지혜:그랬을지도 모르죠. 숨 쉬듯 거짓말하고 살던 탓에 자각 없이 속이고 있던 건 아닐지~ (눈매가 가늘어진다. 시선이 애먼 방 한 곳을 찌른다. 이내 가볍게 눈웃음 지으며 표정을 바꾼다.) 사기 결혼인 거,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윙크!) 자는 사이에 누군가 떠밀려 올 만한 바다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전 운이 아주 좋았던 거군요! 휩쓸려 가기 전에 발견해 주셨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이제라도 감사 인사를 드리면 좋을까요?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남은 옷을 마저 입혀준다. 모양새까지 정돈해 주고, 머리카락도 빼낸 후에 손을 내린다. 반응을 살피다 얼떨결에 네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봤다. 소매, 손목과 손등. 손가락 마디까지 시선이 옮겨진다. 조용히 제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를 매만지다 작게 읊조린다.) 뭐... 익숙해지실 겁니다.
오광철:숨 쉬듯 거짓말. (툭 하고 들었던 단어를 내뱉는다.) 형 남편이 사기결혼 당한 거 눈치채서 가출한 거면 어떡해. 나였어도 도망쳤겠다. (무심코 말한 뒤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핀다. 혹시 너무 심하게 말했나...)
그, 보다 말이야.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나한테 했던 말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이야? (빼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둔다. 나도 숨겼던 것들이 있으니 속인 게 있더라도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두 번이나 휩쓸릴 뻔한 걸 구해줬으니까 감사인사 대신 앞으론 날 은인님이라 불러도 좋아. 생각해 보니 난 아직도 형 이름을 모르는데 형만 알고 있는 거 비겁하잖아. 게다가... 너 나랑 비슷한 나이 아니야? 친구에게 형이라는 소리 들어도 괜찮아? (말한 대로 이 위화감은 곧 잊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소매에서 시선을 떼고 이어 두 눈을 바라본다. 방금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을 생각으로. 그러며 가만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보는 흰색은 다 눈이 아플 정도로 햇빛을 반사하지 않던가. 제대로 흰색을 마주하는 건 적어도 내 기억으론 처음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대답을 들은 뒤에도 눈을 떼고 싶지 않기도 하고...)
백지혜:제 남편은 당신이랑 전~혀 다른 사람이라 그런 저도 좋아해 주셨습니다! 말했잖아요. 말없이 절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시선이 맞닿자,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그대로 웃음 짓는다. 특별히 상처 받은 모습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썩 괜찮아 보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적당히 아련하게. 적당히 장난스럽게. 이미지를 연출하는 건 숨 쉬며 하는 거짓말만큼 쉬운 일이었으니까.) 글쎄요, 직접 맞춰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한 말 중에 의심스러운 것들이 있었나요? 아니면, 전부 믿지 않으셨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보면... 일상 속 이상함을 눈치채는 능력이 더 좋아질지도 모르죠. (으쓱!) 에이, 은인님은 너무 딱딱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저흰 꽤 친한 사이니까 호칭은 이대로 두는 걸로 하고... (꿋꿋하다.)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갚아드리죠. 이름 빼고 다 까먹어드신 분이 나이는 기억하시는 모양입니다. 설령 광철이 저보다 훨~씬 연상이더라도! 하는 짓이 애 같으니까 괜찮아요. (빠르고 단호하게 말한 뒤 몸을 돌려 침상에서 일어난다. 그래도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춘다. 방금 한 질문... 생각보다 더 궁금한 거였나? 여기 온 이래로 평소보다 더 길게 시선이 오간다는 생각에 고개가 모로 기울어진다. 방 벽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다.) 정 맞추기 어려우시다면, 거래라도 할까요?
오광철:그 사람이 말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어? 언제? 몰라 기억 안 나. (괜히 두 사람 사이를 캐 보려다 잘못 건드린 건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이다. 실제로 기억이 흐릿한 것도 맞으니 거짓말도 아니고.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크게 상처받은 듯한 모습은 아니라 맘이 조금 편해진다. 그게 연출된 이미지인 줄도 꿈에도 모를 것이다.) 엇, 어... 음. 의심스러운 거. 그러니... 까. (말이 점점 느려진다. 자신은 그저 이걸 기회로 진짜 이름을 알아낼 생각이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됐지? 여태 했던 말들 중 이름이 형이라는 것과 자신이 잃어버린 남편이라고 했던 둘을 제외하곤 모든 말을 믿었던 것이 맞았기에... 깊은 생각이라곤 안 하고 살던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 내뱉은 답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대답이다.) 사실 형이 마법사다? (긴 침묵. 방금 한 실언을 덮기 위해서라도 호칭은 그대로 두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뭔가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휘말리는 느낌... 뒤이어 멀어지는 흰색에 아쉬운 듯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이를 숨기기 위해 '사실 나 백오십 살이니 은혜도 갚고 나중에 효도도 해.'라는 헛소리를 한 번 더 내뱉었다. 헛소리도 하면 할수록 느는 건가... 싶은 생각을 하던 중, 거래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거래? 나는 좋지만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백지혜:그러니까? (느긋하게 네 답을 기다린다. 반응을 보니 이전부터 안 믿던 말 몇 개 빼곤 잘 떠오르지도 않는 모양인데.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즐거움이 저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온다.. 생각해 보면 팀을 결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이런 식으로 말장난하고, 간 보며 대화했던 날들이 있었지. 의도치 않게 옛 추억이 상기되어 나른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끝내 도출한 질문이 '형이 마법사' 같은 뚱딴지같은 소리라, 얼굴 근육 경련하여 표정이 무너졌지만. 닮은 점이 하나도 없지 않냐, 그때 같이 봤던 것도 잊었냐, 저는 훨씬 더 다정한 사람이다... 기타 바보 같은 반박을 다 끝내고서야 숨을 내쉰다.) 이전에 말한 것도 그렇고, 광철의 기억력이 상당히 안 좋아졌군요. 큰일입니다. 분명 지루한 나날들이 반복된 탓에 뇌 기능 일부분이 장기 휴가를 때린 게 틀림없어요. (중얼...) 아니면 정말 백오십이라? (다시 장난스러운 어조로 돌아온다.) 줄 게 없긴요! (벽에서 몸을 떼 침상에 걸터앉는다. 일정 거리를 두고 손가락 하나로 네 입을 톡, 건드린다.) 아는 것이 힘. 정보야말로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간단한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각자 세 번씩 궁금했던 걸 물어보고 답해주는 겁니다. 오로지 진실만, 침묵은 단 한 번 용인해 드리겠습니다.
오광철:나도 이상한 말 했던 거 아니까 웃지 마... (주먹 쥐고 약하게 몇 번 때리며 반박하는 말들에 다시 반박한다. 같이 있었던 건 분신일 수도 있지 않느냐, 닮은 점이 없다는 건 외모를 바꿀 수도 있겠지... 등등. 반박하다 자기도 웃겼는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한참을 그렇게 같이 웃다 숨을 고른다.) 형이 보기엔 내 뇌가 망가진 것과 정말 백오십. 둘 중 뭐인 거 같... (입 위에 손가락이 올려지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 해봤자 형이 가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면 (짧은 고민, 그리고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을 입에 담았다.) ... 나 형의 진짜 이름이 알고 싶어.
백지혜:추측과 사실은 결이 다르니까요. 직접 입으로 들어야 직시할 수 있는 사실도 좀 있고. (맞은 부분을 괜스레 손으로 매만지며 상체 뒤로 기울인다. 시선 맞추며 질문을 듣는다. 이름이라, 사실 궁금한 건 이거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줄곧 물어봤으니까. 눈을 감았다 뜨며 자세를 바로 한다.) 백지혜입니다. 독립하면 성을 버린다는 것도, 모두에게 존경받고 살라 붙여졌단 것도 거짓말이에요. (작게 웃는다. 기왕이면 기억을 찾아서 스스로 알아내 줬으면 했는데.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로 이어서 제 질문입니다. 숲의 주인과 밤에 한 건 뭘 위한 거죠? 아는 선에서 답해주세요.
오광철:(백지혜, 백지혜. 백지혜! 드디어 알게 된 진실에 이유가 없음에도 세 음절을 계속 말하며 눈에 띄게 기뻐한다.) 이런 이름이라 내가 모르는 것들도 많이 알고 있었구나... (이어진 질문에 대해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어간다. 어차피 이미 한 번 본 사람이기도 하고...) 한 번 마법사 님이 평소보다 늦게 온 날이 있거든. 원래 만나던 시간이 지나자 혼자선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힘들어졌어. 아마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이상하게 전부 끝난 뒤엔 정신이 붕 뜨는 기분이라 이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어.
나 두 번째 질문. 음... (정말 궁금한 게 없는데.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 놓아둔 화관에 시선이 간다.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기 넘치는 화관.) 저거 어떤 생각으로 만든 거야?
백지혜:(연달아 불려지는 이름에 고갤 숙이고 입가를 손으로 가린다. 누구도 제 이름 하나 알았다고 저렇게 기뻐한 적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순수한 칭찬을 들은 것도 처음이다. 이러니 이름을 꾹꾹 숨긴 의미가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려줄 수 있어 다행이네 싶다. 덮어내도 손마디로 웃음이 새어 나간다.. 조금 붉어진 얼굴을 위로 들고 시선만 옮긴다.) 생명 유지... (진정하려는 노력 없이도 질문의 답을 듣자 생각이 하나 둘 쌓여간다. 그렇다면 멋대로 손을 대는 건 좋지 않겠지. 기억을 되찾아도, 나갈 수 있게 된대도 죽어버리면 무용이야. 그래도, 그날 본 건 분명 상대를 위한 행위라고는... 배려나 다정 같은 건 둘째 치고. 흘러나온 기이한 액체가 역시 수상하다. 서양 영화에선 악마 같은 게 저런 식으로 영혼을 빨던데. 역시 주방에서도 한 번...) 으음. (생각을 갈무리하고 옅은 웃음을 짓는다. 꺾어도 시들지 않는 꽃이라. 이 저택은 전부 그런 식으로 굴러가나?) 처리가 기분을 풀어주었으면 해서요. 잘 어울릴 거라고도 생각하긴 했지만, 보통 저런 건 사심이 담긴 거니까 나중엔 경계하며 받으셔야 합니다.
다음은... 아직도 저랑 같이 갈 생각이 없으십니까?
오광철:(고개를 숙였다 드니 붉어진 얼굴. 혹시 더워서 그런가? 맞지 않는 추측 끝에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반투명한 커튼으로 가린 뒤 돌아온다. 옆에 앉아 손부채질을 하며 안색을 좀 살피기도 하고. 뒤이어 중얼거리는 생명 유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옛 기억을 되짚어본다.) 아. 섬에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혼자 섬을 돌아다니다 너무 배고파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그땐 마법사 님이 상처를 내서 피를 먹여주기도 했었어. 그러니 방까지 걸어올 수는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갈수록 말이 흐려진다.) 사심? (머릿속으로 질문이 스쳐간다. 마법사 님은 저런 거 줄 사람이 아니고, 그를 제외하면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지혜 뿐인데 타인이 내게 사심을 가졌는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나중이 나에게 존재할까... 마지막 질문을 속으로 정해놓고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하기 시작한다.) 응. 여기서 사는 거 나쁘지 않아. 내가 진짜 지혜의, 형의 남편이라면 당연히 따라갔겠지만 아직 그건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럼 내 마지막 질문인데. 형이 줬던 화관엔 사심이 담겨 있었어?
백지혜:(얼굴 앞에서 열심히 부채질 중인 손을 가만 바라본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어진 얘기에 의문은 묻힌다. 그럼 계속 피나 줄 것이지 그 끔찍한 짓거리는 뭐람. 이번엔 미간이 티 나게 구겨졌을 테다. 숲의 주인이란 작자의 타액과 오광철은 생명 유지로 이어져 있고, 오광철의 어떤 것은 숲의 주인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뺏기기 싫어 소리까지 지르던 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지. 설령 그가 길잃은 광철을 지극정성 보살펴 주던 중일 뿐이더라도, 실상 마음 착한 괴물일지라도 순순히 두고 갈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턱을 두 손으로 괴곤 시선을 맞춘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 웃는 낯짝에 애석함이 물씬 묻어나긴 했겠지만.)
(이은 질문엔 꽤 긴 침묵이 흐른다. 그저 가만히 시선을 맞춘다. 그 정적은 한쪽의 말로 깨지진 않았다, 끼익. 몸을 굽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고, 손을 짚고 일어나 시트가 사륵 떨어진다. 제 것보다 조금 더 작은 결혼반지.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그것을 비춰보고, 돌려보며 눈에 담는다. 시선은 곧바로 네게 돌아간다. 뭘 하려는 건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천천히, 손을 이끌고 펼쳐 반지 하나 올려둔다. 그 어떤 말도 없었으니 이는 침묵이나, 어떤 말보다 의도가 명확한 대답이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제가 관심도 연관도 일말 없을 완전한 타인에게, 이런 정성을 쏟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오광철:연관 없는 타인에게 정성을 쏟을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손 위에 올려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손을 이끌어 위에 올려준다. 단순히 이대로 끝났다면 거절의 표시였겠지만, 비어있는 왼손을 내미는 것으로 행동의 의미를 바꾸었다. 여전히 반지에 대한 거부감은 남아있는 듯 무릎에 올려놓은 반대쪽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꽉 주먹을 쥐었고, 꽉 깨문 아랫입술은 새하얗게 질려가면서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 믿어봐도 돼? 내가 진짜 남편이라고.
백지혜:(다시 돌아온 반지를 보고 눈 밑이 일그러진다. 실망감과 절망, 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눌러내며 고개를 든다.또다시 태연한 낯을 꾸며내며 능청 부리려 했을 때, 내밀어진 왼손이 시야에 든다. 동시에 모든 움직임이 멈춘다. 힘 주어 창백해진 안색, 꽉 쥐고 있는 오른손. 긴장하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양새가 안쓰럽다. 그럼에도 믿겠다고, 믿고 싶다고. 믿어도 되겠냐는 그 물음이 사랑스러워서... 낮춘 자세 그대로 이마 위에 입술을 댄다. 잠깐 떨어져 시선을 맞추고, 무릎 위로 손을 올려 감싸 쥔다.. 안심시켜 줄 수 있는 말은 없겠지만, 순전히 기쁨으로 차오른 미소를 띠며 답한다.) 후회할 일 없으실 겁니다.
(덩달아 긴장한 듯 반지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왼손을 붙들고,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준다. 끝내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우려심에 안색을 천천히 살핀다.)
백지혜:애초에... 계속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목을 감싸 안고 얼굴을 묻는다. 기쁨이 넘실거리는 목소리로, 짤막한 웃음소리를 섞어내며.) 바보.
오광철:방금까지의 난 잊어줬으면 하는데... 그거 나 아니야. 가짜야. (정말 오랜만에 안겨보는 품을 한껏 만끽하려는 듯 팔로 등을 감싸고 더 꽈악 끌어안는다. 예전만큼 강한 힘으로 안아주진 못하지만 이 정도 힘만으로도 상대가 품 안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건 충분했을 것이다.) 응. 나 바보야. 남편을 걱정하게 만드는 A+급 바보. 바보는 재활용 안 되니까 평생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괜찮아? (물어보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먹먹하다.)
백지혜:(푸핫, 작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조금 상체를 뒤로해 시선 맞추다가 눈매 가늘게 하며 웃는다.) 많이 달랐던 거 같긴 했어도, 확실히 광철이었습니다. 절 좋아하고 있는 게 확연히 보였거든요. (뺨을 손으로 문지르다 짧게 몇 번이고 입 맞춘다. 그제야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며 다시 품에 얼굴을 묻는다.) 그 바보 주우러 여기까지 왔잖아요. 버릴 일 없습니다. 가출하지나 마세요! (콩! 등을 살짝 때린 후 토닥인다. 달래주려는듯 반복적이고 안정적이게.)
오광철:(어느새 맺힌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내다 탓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거 다 형이 다시 반하게 만들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반했을걸. (섬에서 같이 보냈던 나날을 기억한다. 이렇게 대해준다면 누구나...까지 생각하고 조금 꽁해졌으나 이어지는 입맞춤에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형이 이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기분 나빠하는 건 시간 낭비겠지.) 가출한 남편 잡는 건 집으로 돌아가야 성공인 거 알지?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달래려는 손길이 무색하게도 점점 훌쩍이는 간격이 짧아지고 한참을 그러며 안겨있었다.)
백지혜:기억을 잃었다는데, 데려가려면 온 힘 다해 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런 저에게 반하는 건 광철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짓궂게 굴었던 기억이 태반인데. 잊는다면 같이 잊어주는 게 좋을 거 같다. 이런 기억도 추억으로 남길 수야 있겠지만, 같이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욕실에서 바보 같은 웃음을 터트리는 것까지. 돌아가서 얼마든 즐길 수 있으니까.) 네, 돌아갑시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요.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눈가를 핥고 떨어진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왼손을 네게 내민다.)
돌아가는 방법, 확실하진 않지만 짚이는 게 있습니다.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통할진 모르겠지만요.
오광철:나라면 굳이 안 꼬시고 자고 있을 때 들고 날랐을 텐데. 많이 봤거든. 시켰고... (장난스럽게 체감상 거의 10년은 지난 옛날 일을 떠올린다. 새삼스럽게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실감하다가) 혹시 나 예전이랑 많이 달라? 그쪽에선 며칠 밖에 안 지난 일인 거잖아. (다른 생각에 빠지면 원래 하던 일을 금방 우선순위에서 치워버리는 버릇이 나온다. 눈가를 핥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돌아가면 일단 머리부터 자를까. 기르고 싶었는데. 한참을 길어진 머리카락에 집중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손을 보며 다시 정신을 차린다.)
형이 생각한 방법이 통했으면 좋겠다. 혹시 안 통해도 걱정하지는 마. 섬에서의 시간은 기니 언젠가 방법을 찾겠지.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나고 어쩌면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방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그 짚이는 방법이 뭔데?
백지혜: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어떡합니까? 그럼 전 살아갈 수 없을걸요. (고작 며칠이긴 했으나,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봐와서 그런가.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역력하다, 머리카락 매만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 젓는다.) 여전히 귀엽고 예뻐요. 돌아가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몇 살인지 맞춰보라고 하는 것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꼭 통한다면 좋겠군요. 그런 밤을 다시 보내게 하기 싫습니다. 그것도 기억도 찾은 중에. (투덜대듯 말하긴 했지만... 들어먹히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을 테다. 이를 꽉 깨물고 마음속에서 숫자 열을 센다...) 주방에 있던 반짝이는 꿀 기억하십니까? 그걸 써서 분수를 통해 어딘가로 들어가는 게 아닐지요. 그것만 줄어있었잖습니까. 아마 먹는다거나, 바르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둘 다 해보죠.
오광철:돌아가면 처음 보는 장소인데다 나이도 달라졌으니 신분도 불명확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그런 상태에서 아는 사람이 나뿐이면 자기가 미워해 봤자 어떡하겠어... (전혀 웃을 이야기가 아님에도 이런 나쁜 생각도 참 오랜만이라는 걸 인지하니 입꼬리가 슥 올라간다. 이후로도 몇몇 생각이 짧게 이어지고 그 생각을 끊는 건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 형 눈에만 귀엽고 예쁘면 됐어. 다른 사람이 몇 살이라고 생각하던 내 알 바인가... 음. 그래도 자열 씨에겐 말해야 하나.
만약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난 마법사와 한 뒤에 형이 한 번 더 해주면 괜찮은데... 어차피 걘 일요일 저녁에만 오고 형이랑은 계속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것도 나름 위로... 인가? 맞잡은 손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주방으로 갈까~
주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선반에서 저번에 봤던 황금빛 꿀을 찾습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반 컵 정도 줄어있는 양입니다.
백지혜:제 심정도 헤아려 주세요. (어찌됐든... 선반에서 꿀을 꺼내고 컵 두개도 찾습니다. 둘 다 반 컵씩 따르고 하나는 처리에게 건네줍니다.) 짠 할까요?
오광철: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것치곤 잘 보던데... 그때 기분 어땠어? (짠. 잔을 부딪힌 뒤 달콤한 꿀을 천천히 마신다. 너무 달아서 입안이 아프고 코가 찡해지는 맛. 순간 눈앞에 은하처럼 반짝이는 풍경이 환각처럼 펼쳐지다 사라진다. 마법사 그 자식 이걸 매주 먹었단 말이야? 제정신인가...)
백지혜:예? 저 눈 감았는데요? (뻔뻔...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시선 돌린 채 컵을 입에 댄다. 흘긋여 마시는 것 확인하고 자신도 천천히 입에 머금는다.)
오광철:눈 마주쳤잖아... 거짓말쟁이. (먹거나 바르거나라고 했나. 다 마신 걸 확인하면 남은 꿀을 손으로 크게 떠서 지혜 뺨에 치덕치덕 발라준다.) 요새 트렌드는 꿀 팩이래요 손님,
백지혜:그때 잠깐 뜬 겁니다. 어떻게 그런 모습을 제정신으로, 두 눈 뜨고! 가만히 볼 수 있겠어요. (제 옷깃을 부여잡고 훌쩍이는 소리까지 내다, 차가운 꿀이 찰박 묻어나자 흠칫 몸을 떤다. 곧 장난스러운 표정 짓곤 제 손에도 꿀을 잔뜩 묻혀 네 두 뺨에 대고 문지른다.) 좋은 거 저만 할 순 없죠. 부부란 좋은 거든 아니든, 뭐든 함께 나누는 법이랍니다.
(그 모습을 잠깐 보다 작게 웃곤, 다시 손 잡아 이끈다.) 그럼이제 나갈까요?
오광철:진짜? 난 또 형이 그런 특이 취향을 가진 변태인가 고민했지 뭐야. 형을 위해 모르는 사람 하나나 둘 정도 집에 초대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물론 농담이다. 한참을 그렇게 장난치고 놀다가 이끄는 손을 따라간다.) 집에 가면 케로베로스가 엄청 울겠다. 제일 먼저 애들부터 안아줘야지~
백지혜:(그 말에 눈썹 한쪽이 팍 구겨지며 올라간다. 그대로 가만히 응시하다 잡은 손 제 쪽으로 팍! 당겨 품에 안는다.) 무슨 생각 했는지 궁금하셨다고요. (귓가 가까이에 입을 대곤 천천히, 정확히 읊조리기 시작한다.) 짜증나고 초조했어요. 내 사람이 해괴한 것에 안겨 있는데 할 수 있는 건 없고, 멋대로 느끼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제 인내심이 조금 더 없었다면 우린 또 1년 뒤에나 만날 수 있었을걸요? 그럼 광철은 내가 제대로 잠도 못 자는 사이 수십번 그런 밤을 보내게 됐겠죠. 생각하는 것만으로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요. (귀 아래, 목선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뗀다.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케로베로스 한테는 어쩔 수 없죠. 양보하겠습니다!
오광철:(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입꼬리가 올라간다. 특히 내 사람이라고 말해준 것이 만족스러워 콧노래를 부르며 입이 닿았던 목선을 매만진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사라졌던 1년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날 생각했구나~
저택을 빠져나와 분수의 앞에 도착합니다. 분명 허벅지 정도 되는 높이의 분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새파란 물이 보입니다.
뛰어들 준비는 되었나요?
백지혜:(광철의 손을 꾹 잡은 채 시선을 마주한다. 옅은 웃음을 짓다가... 머뭇거리며 말 꺼낸다.) 성공한다면 다신 안 오게 될 텐데, 이 저택에서 끝낼 건 없으십니까?
오광철:끝낼 거... (몸을 돌려 저택의 모습을 살핀다. 몇 년간 지냈던 장소에 다시 오지 못하게 되는 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꽤 오랜 시간 두 눈으로 저택의 풍경을 새기고 다시 몸을 돌린다.) 없어. 바로 가도 돼.
백지혜:(오래간 저택을 바라보는 모습을 얌전히 기다린다. 가도 된다는 답을 들은 후에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분수 표면에 발을 올린다.) 돌아간 후엔, 이곳에서보다 더 즐거운 삶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