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구름이 촘촘하게 덧쌓여 있음에도 햇빛은 마치 노쇠한 기병처럼 실 가닥 같은 빛줄기를 더디게 내리쬡니다.
바닥으로, 마차로, 그리고 세이블, 당신이 탄 내부로도.
잠시 창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는 순간, 새벽 동안 창가에 붙어있던 이슬이 흘러 손 위로 떨어집니다.
흘끗 눈을 돌려 본 바깥은 안개가 하얀 곰팡이가 음식에 내려앉듯 짙게 깔려서 왔던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날, 이런 인적 없는 산길을, 황실과 교류를 할 정도로 성장한 상단주인 당신이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 사실 알고 있잖아요. 기디언 때문이란 사실을.
그가 가문 간 정략결혼을 이유로 일주일 전 저택을 떠나게 됨으로써, 당신이 팔자에도 없을 흙길을 달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혼식이 치러지는 마을까지 가는 나흘, 당신은 마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세이블:...이 마을에 금은보화라도 묻어둔 건가? (몇시간 째 말을 하지 않았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온다. 말투나 그 높이, 물기 가득히 섭섭함을 담은 그 감정도 닿는 이 없이 그저 마차 안을 부유하다 픽 꺼질 뿐이다. 창 밖에 있던 시선을 제 손 끝으로, 다시 창 밖으로 옮기는 동안 두터운 커튼을 잡아 끌어내린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고서야 눈을 바로 뜨고 굳은 몸을 풀어 나간다. 무슨 생각을 했냐니, 사랑해 마지 않는 동생... 애정하는 나의 기디언. 그의 결혼식이니 기쁜 감정이 솓구침이 응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욕으로 가득찬 소란스러운 마음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 결혼 소식, 그러니까. 정략결혼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몇번이나 붙잡고 되돌릴 계획을 세웠었지. 그 중 단 하나도 실행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손익만 따지고 장사해 먹는 자식이라도 제 삶을 밑바닥에서 건져내준 은혜로운 분들의 대소사에 어찌 물을 끼얹겠는가. 그러니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건 긴 시간 홀로 창밖이나 보아 외로웠기 때문이고, 온갖 불온이 쏟아지는 마음은 나흘이나 걸린 긴 여정에 피로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다양한 생각들이 떴다 가라앉고 가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체감이 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사를 나누고, 일을 하다가, 평소처럼 식사하고… 아니, 그날도 이렇게 안개가 꼈던가.
결혼이란 좋은 소식을 듣는 날이라기엔 그다지 좋지 못한 하늘의 색과 눅눅한 습기가 바닥을 채웠습니다.
기디언 헤르모드. 갈 곳 없던 어린 시절의 당신을 받아 키워준 헤르모드 후작가의 적자이자 당신이 동생처럼 돌보고 같이 성장해온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에 당신을 찾아와 통보했습니다.
기디언:마차로 3일은 꼬박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래. 상대 쪽 가문이 폐쇄적인 집안이라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어. ... 나 이제 형과 만날 수 없는 걸까? 싫은데.
세이블:... (두 잔에 나눠 따르려던 물이 한 잔에만 가득, 넘쳐 흘러 질질질 새고 있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비보. (입 밖으로 내고서야 단어 선정이 옳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손이 입을 막으러 간 덕분에 카펫이 젖어 드는 걸 멈출 수 있었다.) ...농담같은 건 아니죠?
기디언:비보 맞지 뭐. (자연스럽게 가득 찬 물을 빈 잔에 적당히 따라 버린 후 가져간다. 잔에 시선을 뒀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응. 가기 싫다고 우겼는데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혼처래. (몇 번 마른 기침을 반복하다 들고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안 좋은 일은 겹쳐 온다고 요새 몸도 좀 안 좋고. 차라리 확 크게 아파서 결혼하러 갔다가 건강 문제로 파혼되면 좋겠다. (반쯤 진심.)
세이블:(주변을 잠깐 살피다 한숨을 내쉰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혼처라니. 난 전혀 들어본 적 없는데. 반응을 보니 그건 기디언 역시 마찬가지인 거 같지만. 아니, 그래도 난 꽤 신임받고 있었으니 살짝 알려줄 법 하지 않았나?? 어릴 때부터 그의 인맥이나 작은 결정들, 사소한 문제도 해결해 준 게 바로 난데! 몰랐다가 어디 참한 영애랑 손이라도 잡게 했음 어쩌려고. 물론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반 채워진 남은 잔을 가져가 물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생각하던 게, 연달아 들린 기침 소리에 끝맺힌다.) 괜찮으십니까? 요즘 날씨가 영 좋지 못 했으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만, 늘 건강하던 기디언이 그러니 걱정되네요. (옅은 웃음을 짓곤 주변에 있던 숄을 들고 와 어깨를 둘러 감싼다. 잠깐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한 후 떨어진다.) ...다시 못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리 폐쇄적인 가문이라도 문을 달려있을 거 아닙니까. 기디언이 못 나오면 제가 들어가면 되지요. (눈 맞춰 사근히 웃었으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 아, 왜 축축한 하늘에 벼락까지 떨어진단 말이냐.)
기디언:(한 번 시작하니 멈추지 않는 기침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멎는다. 이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인데 진짜 파혼당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과 동시에 마지막일 수도 있는 만남에 소중한 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투정 부리는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안 괜찮아. 숨쉬기도 힘들고,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이거 다 형이 상단 운영한다고 안 놀아줘서 그래. (어깨 위에 덮어진 숄을 제대로 정리한 뒤 잠시 생각에 빠진다.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한 부분이 생각나서...) 그런데, 아무리 폐쇄적인 곳이라고 해도 이 나이 되도록 초상화 한 점 보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나 태어날 때 아버지가 사고 쳐서 문제 있는 사람에게 팔려가는 거 아냐? 여태 말도 없다가 갑자기 서둘러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따라 웃었지만 표정엔 여전한 불안감이 서려있다.) ...말대로 문은 있을 테니까. 형이 꼭 일주일에 한 번씩 와줘야 한다? 약속해줘.
세이블:(숨쉬기도 힘들고,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거면... 감기? 목이 부었나? 따뜻한 물을 내줘서 다행이었다. 후작가 사람들은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단 말인가. 결혼 준비에 바빠선 정작 그 주인공을 못 챙겼다니... 기디언은 장난처럼, 기분 좀 풀려고 한 말이었겠으나 아무래도 제가 상단 일 탓에 그 곁에 있어 주지 못 했던 탓 같았다. 확실히 내가 붙어있었다면 이렇게 아플 일도, 영문도 모르고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 달이라도 더 일찍 소식을 알았다면, 적어도 그 상대의 초상화 한 점 구해봤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이면 오고 가는 데에 6일 걸릴 테니, 차라리 제가 그곳에 땅이라도 사는 게 낫겠습니다. (농담같아도 사뭇 진지했다. 상단이야 맡겨둘 사람 하나 정돈 있겠지만, 기디언은 맡길 사람이 없으니까!)
네, 약속할게요. 기디언이 거기서도 저와 만나게 될 거라는 것. (먹먹한 심정에 손을 잡아 이끈다. 그러길 잠시, 뒤늦게 말을 잇는다.) 그런데, 상대는 누굽니까? 이름은 들으셨나요?
기디언:아, 그렇네. 오고 가는 데 6일이었지. 그럼 땅 사기 전까진 한 달에 한 번으로 참아줄게. 그 근처에 땅을 사면 형도 그쪽에서 혼처를 알아보게 되려나. 그럼 내가 주례를 서야지. 먼저 가서 형에게 소개할 좋은 사람을 찾아봐도 되겠다. 상단의 분점을 세우면 지역 경제에도... (이후로도 쭉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다리를 까딱거린다. 요약하자면결혼한 뒤에도 나랑 쭉 같이 있어줘.가 되겠다.)
약속 안 지키면 저주할 거야. 형이 잡는 사업마다 다 망하라고 밤새 기도할 거니까 지켜야 해...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놓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끼고 나서야 만족하는 듯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있지만 만나러 와준다는 말 한마디에 전부 놓이는 기분이다.) 몰라. 이름도, 사는 지역 명도, 심지어 나이나 성별도. 결혼 소식을 들은 뒤 저택에 사용인이 찾아오는 걸 보면 실존하는 사람이긴 할 텐데... 나머진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
세이블:음? 제 나이에 혼처를 알아보는 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눈을 두 번 깜빡인다. 주례를 선다는 것도, 소개할 좋은 사람을 찾아본다는 것도 참 당돌하고 순진하고... 긍정적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예전부터 낙관적인 태도는 변하질 않는구나.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고개 끄덕인다. 그래, 결혼 한 번 하는 요즘 시대에 큰일도 아니지. 특히 가문 간의 사랑 따위 없는 무미건조한 것 따위 한 번 끊겨도... 중요한 건끝까지 그의 곁에 남는 것이다.)
그런 저주라니 무섭습니다. 기디언이 하는 기도는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더욱. 사업 한두 개 말아먹으면 탓하러 갈 거니까 문 열어두세요.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버릇 같은 윙크를 하고, 안도한 듯 편안한 표정을 보고야 작은 숨을 내쉰다. 기디언의 결혼으로 제 기분이 어떻든... 제일 걱정되는 건 본인이겠지. 이름도, 지역도 나이나 성별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게. 앞으로의 남은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는 게.................... 새삼 입 끝이 뒤틀린다.) 비밀이 많은 상대로군요...
기디언:조금 늦기는 했지만 못할 건 없지... 상인 중에서 찾으라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고. 아, 귀족 중에서 찾으려면 재혼이 대부분이긴 하겠다. (길게 고민한다. 금전적인 부분은 나나 형이 책임질 수 있으니 어떤 사람이 형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를 우선적으로. 작위를 사 남작이 되었다지만 세이블이 평범한 귀족처럼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이어가진 않았으면 좋겠어서...)
기도가 통하면 탓하는 게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 와달라고 빌어야 하는 거 아냐? 싫어하는 사람에게 저주의 기도를 내려주는 사업. 수요 좋을 거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귓가에 속삭인다.) 저주 걸면 찾아와 달라는 신호니까 진짜로 와야 해. 날 사업 파트너로 삼겠다며 당당하게 배우자 앞에서 납치해 도망 쳐줘. 할 수 있지?
대화가 얼추 정리되자, 집안사람들이 찾아와 연행하듯 기디언을 데리고 일어섭니다.
끌려가는 와중 마지막으로 세이블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사용인들의 손에 막힙니다.
그렇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랐을 리가 있나요.
연락을 취하려고 해도 집안 사람들은 한 번도 저택 밖으로 기디언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편지를 보내면 태워버리고, 사람을 보내도 돌려보내더군요.
며칠을 내내 수소문한 끝에 겨우 기디언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곳이미저르 힐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시선이 움직인 이유가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일지. 검기까지 한 진녹색 풀숲과 전혀 맞지 않는 하얀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련된 무늬가 수놓인 백색의 신발. 한눈에 보아도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신을 법한 비싸 보이는 신발은 켤레가 아닌 한 짝만 놓여있고, 그 주변의 풀들은 전부 한 방향으로 꺾여 쏠려 있습니다.
세이블:(아까까지 안개로 한 치 앞이 안 보였는데, 갑자기 숲이 나타나다니, 그것도 이렇게 울창한... 그런 의문은 깊게 가지 못했다. 제 눈에 하얀 신발이 띄어서. 이곳에 헤르모드 가문 결혼식이 열린다는 건... 확싱해도 될 것이다.. 영 믿음 안 가는 사람의 말이었지만. 그러니 이 신발은 기디언의 것인가? 왜 한 짝만 덩그러니 있는 걸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신을 주워 들고 잔디가 꺾인 방향으로 걸어가며 살펴본다.)
그러고 보면 몇 번 신발을 신겨준 적도 있었죠. 무서울 정도로 손에 익숙한 크기입니다. 기디언의 신발이 확실해 보여요.
이어 잔디가 꺾인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파삭거리며 무언가가 밟혀 무참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빠르게 내려다봅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곳 여기저기에 누렇게 변색하여 탁한 빛을 띠는… 기다란 다리뼈가 당신의 발에 밟혀 조각났음을 알아차립니다.
축사에 도착합니다. 닭, 양, 염소, 돼지, 소와 말 등이 모여 있는 축사입니다. 울타리를 기준으로 땅을 나누어 기르고 있습니다. 짐승 특유의 비린내가 지독하게 나고 있으며 건초가 사람 키만큼 쌓여 있습니다.
축사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마을 주민 한 명이 불러 세우더니 말을 겁니다.
마을 주민:친구! 축사 일 도와주러 온 건가? 닭 모이 정도는 줄 수 있지?
세이블:(지금 한가하게 닭 모이 줄 정신도, 시간도 없지만... 부자연스럽게 굴다간 저 시체더미다.) 그럼요. 제가 하겠습니다!
마을 주민:어우 젊은 청년이 싹싹하기까지 하고 얼마나 좋아. 우리 아들도 좀 본받으면 좋을 텐데! (환하게 웃으며 등을 팡팡 친다.) 경사스러운 날이니 정성스레 줘. 얘들도 오늘이 어차피 마지막일 텐데~ 가는 길 기분이라도 좋게 뿌려줘야지.
세이블:(오늘이 어차피 마지막........ 등을 팡팡 치는 손길에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웃음 짓는다.) 예에... ...그런데, 제가 너무! 바빴었어서... 그거, 언제 시작하죠...?
마을 주민:결혼식 말이야? 어쩐지 얼굴이 낯설더니 신입인 모양이네. 딱 좋을 때 왔어 청년! 결혼은 3시니까 어디 보자...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본다. 머리 위에 떠있는 태양으로 보아 12시~1시 쯤?) 지금 해 떠있는 거 보면 한참 남았겠네.
세이블:(이 마을엔 신입도 들어오나? 하긴, 그렇게 넓어보이진 않는데 사람을 막 죽이고 그러면... 어디서 유입도 있긴 해야겠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마을이길래 그 흔한 시계도 없으며, 아이들마저 시체를 거리김없이 대한단 것인가...)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며 닭 모이 주러 갑니다...)
마을 주민:방금까진 싹싹하던 청년이 왜 갑자기 말이 없어졌대? 다 줬으면 나중에 시간 될 때 목공소에 한 번 들러줘. 남편이 필요한 게 있다고 했던 거 같거든!
세이블:(이 마을 사람들은 남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써먹는단 말이야? 의문 가득한 머리와 달리 얼굴 위론 한껏 유하고 둥글게 웃음 만든다.) 조금 긴장되어서요! 목공소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마을 주민은 말을 마치고 닭 모이 주는 데에 집중합니다. 다시금 축사를 둘러보면 축사 옆으로 나무로 된작은 농막이 보입니다.
세이블:(정성껏! 열심히 닭모이를 주다가... 틈을 타 작은 농막 쪽으로 가 살펴봅니다.)
농막은 잠금쇠가 걸려있지 않습니다. 삐걱거리는 판자문을 열고 농막 안으로 들어가면 곡괭이와 삽, 쇠스랑 같은 온갖농기구가 벽에 걸려있습니다. 구석에는나무 상자도 여럿 쌓여 있네요.
세이블:(농기구 부터 살펴봅니다. 시체 만드는 일에 썼던 건... 아니겠지.)
농기구 주변엔 도축용 칼을 포함하여 조각칼, 단도, 농기구 등 여러 자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도축용 칼은 어찌나 날을 잘 갈아냈는지 작은 빛에도 서슬 퍼렇게 번쩍입니다.
세이블:(손을 댈 일이 안 생기면 좋겠군. 이어 나무상자를 살펴봅니다.)
안을 확인하면 양초가 차곡차곡 들어 있습니다. 농막에 왜 양초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건지…
상자 주변엔 부싯돌 몇 개도 같이 놓여 있습니다.
세이블:(물어본들 좋은 일은 안 생길 것 같다.)
(축사를 더 살펴봤자 나올 건 없겠지. 목공소라고 했던가. 이런 마을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전부 살펴보긴 해야할 것 같으니까.목공소로 갑니다.)
목공소에 도착합니다. 숲에서 베어낸 나무토막이 산처럼 쌓여 있으며 도끼와 톱을 비롯한 자재가 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주민 한 명이 그루터기에 앉아 칼을 만지작거리며 손안에서 무언가를 다듬고 있습니다.
세이블:저어, 실례합니다! (기웃거리며 손안을 슬쩍 확인한다.) 도울 일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목공소의 주민: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의 소개를 받고 왔지?
그가 쥐고 있던 건 ‘작은 돌’입니다. 단도로 돌 하나하나를 파내었는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지만,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한 무늬가 나 있습니다.
세이블:아, '신입'이라서요. 저기, 축사에 계신 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편분께서 필요한 게 있다던데요!
목공소의 주민:아 신입인가? 운이 좋구먼 자네도. 어리바리해 보이는데, 다들 바쁘니 예식장 주변엔 얼씬거리다 찍히거나 말고. 그보다 오자마자 다시 보내게 돼서 미안하네만 하는 일이 없으면 내 심부름이나 하세.
돌을 조각해야 하는데, 마땅한 도구가 없거든. 여긴 도끼랑 톱만 있어. 단도로 하루 종일 파고 있으려니 눈 빠질 지경이라고. 쓸만한 칼을 찾으면 좀 가져와 주게나.
세이블:에이, 어리바리해 보이긴요! 저 어디가서 일 못 한다는 소리 안 듣습니다. 다 믿음이 가니까! 남편되시는 분 일에 보낸 거 아니겠습니까? (활짝!) 결혼식 일도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참, 아쉽군요... 아무튼, 칼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무늬를 조각하시는 건가요? 알면 더 적당한 칼을 찾아드릴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죠...
목공소의 주민:이 시기에 하는 일이야 뻔하지. 결혼식 준비 말고 더 있겠나? 내 심부름이 곧 결혼식 준비일세. 아무리 신입이라고 해도 이 정도 기본은 알아야지. 이래선 어디 가서 주례사 님에게 고개도 들지 못하겠군... (쯧!)
세이블:아앗, 네에... (어리바리해졌네. 여전히 웃는 낯 유지하며 뒷목을 문지른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칼, 빠르게 찾아올 테니 조금 기다려 주세요! (하고 뒤돌아 빠져나온다...)
(칼이라면 아까 본 축사에 아주 잘 갈린 걸 본 기억이 있는데. 축사로 돌아가기 전 중앙의 우뚝 선나무 상자를 흘긋 확인해 본다.)
나무 상자를 살펴봅니다. 합판과 못, 누더기 천을 엮어 만들어진 상자입니다. 성인 한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며 밖에서 잠글 수 있는 걸쇠가 튀어나와 있습니다. 자물쇠도 함께요.
세이블:(마을 한 가운데 이런 게... 무슨 용도인지 몰라도, 좋지 않은 예감이 스친다. 오늘이 결혼식이라면서, 결혼식을 상징하는 하얀 천이라던가, 화사한 꽃다발이나 달콤한 음식. 샴페인도 보이질 않으니... 분명 내 상식의 결혼은 아니겠다 싶었다. 나무 상자 안을 좀 더 잣[히 살펴 볼 수 있나요?)
(자세히...)
나무 상자를 자세히 살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민:뭐 하고 있는 거지? 감옥에 볼 일이라도 있는 거냐?
세이블:(감옥?) 엇, 아뇨?
(이렇게 된 거 좀 띨띨해 보이는 게 의심사는 것 보다 낫겠군....) 칼이 없나 해서?
주민:볼 일도 없는 녀석이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지. 감옥에 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건 백치가 와도 알겠다.
목공소의 주민:말 돌리지 말게. 앉아서도 자네가 주민들에게 말이 걸리는 걸 볼 수 있으니. 한 번뿐인 결혼식이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평소보다 예민해서 그래. 자네가 이해하게나. 아직 마을에 익숙하지 않을 코흘리개를 위해 어른인 내가 조금 가르쳐 줄 테니. 궁금한 게 있음 물어보게.
세이블:(하, 빌어먹게 좁은 마을. 돌만 깎는 줄 알았더니 다 보고 다 듣는단 말이지... 눈매가 가늘어진다. 궁금한 걸 물어보라고 해도, 아까는 엄청 성질내지 않았던가. 적당히 재가면서 해야겠어.) 코 흘릴 나이는 아니지만... 알려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저 감옥, 무슨 용도입니까?
목공소의 주민:감옥이 감옥이지 다른 용도가 있겠나? 가끔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와서 말이야. 평소라면 주례사님이 데려가겠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요새 결혼식 준비로 바쁘지 않나. 그래서 임시로 세워둔 걸세.
세이블:(오면 가두는 용도라... 훨씬 전부터 느기긴 했지만, 역시 상식이 없는 마을이다. 부디 같힐 일 없다면 좋을텐데.) 결혼식 준비라는 거 말이죠, 일주일 전부터 시작됐습니까? 아니지, 열흘정도 걸렸나요?
목공소의 주민:일주일이나? 잠깐... 자네, 이 결혼식이 왜 열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겐가? 아무리 신입이라고 해도 이마저도 모를 수가 있나.
두꺼운 융단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두께와 길이, 붉은빛이 경사스러운 일을 위해 염색된 천임을 알아봅니다
곧 다가올 경사스러운 일이라면…… 역시 기디언의 결혼식뿐이겠죠.
마을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모두 결혼식 준비를 한다니, 기디언이 결혼하게 될 상대는 얼마나 덕망이 높은 사람이길래…
하지만 당장 오늘이 식 아니었던가요? 결혼식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줄 알았으나 애꿎은 물만 솥단지에 한가득 끓고 있는 둥, 결혼식에 쓰일 음식도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주민들은 시간에 쫓긴다거나, 분주한 모습을 보이기보단 설렁설렁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날짜만 대충 맞추면 되는 사람처럼…
세이블:(결혼식에 붉은 천을 쓰는 건 들어본 적 없는데. 장식에... 쓸 천인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헌사가 덜 작성된 탓에 결혼식은 밤으로 밀린 모양이고, 기디언은 주례사란 사람의 집에서 준비 중인 듯 하다. 한 번뿐인 결혼식이라... 이런 마을에서 결혼해 봤자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리 없다. 애초에 살아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무리 폐쇄된 가문이라 한들 단 한 번 나오지 못한 다는 건 말도 안 돼. 죽는 거나 다름없어. 그래, 결혼식을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기디언을 데리고 이 마을에서부터 도망쳐야 해. 신발이나 브로치가 길에 널려있는 것도... 기디언이 순순히 따라가지 않았단 뜻 아닌가.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애초에 시작돼선 안 됐다.)
(...하지만 저 숲을 넘어 잘 빠져나갈 수나 있을까. 더군다나 기디언과 만나는 일도 문제다. 주례사의 집은 이 목조건물과는 다른 형태로 지어진 모양이니까 더 둘러본다면 보이겠다만... 의심받지 않고 접근하는 건 불가능 할 테다.)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고개를 드니,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입니다. [석조 건물], [창고], [예식장]...
세이블:(저 석조건물에 기디언이... 예식장이나 석조 건물 주변을 막 돌아다니면 의심받을 테니까, 우선창고부터 갑니다.)
주민들은 저마다 앞치마를 둘렀거나 수건을 가지고 나오고 있습니다. 혹은 양동이를 이고 있거나.
그들의 옷에는 검붉은 흙 자국이 가득합니다.
우선 저 안에 들어간 이들의 눈을 돌릴 방법이 없을까요? 그들이 한 번에 나오게 한다던가… 그렇게 되면 침입하기가 좀 더 수월할 텐데.
세이블:(이 마을은 정상이 아니라고, 존재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실종 포스터에 걸린 사람들의 시체,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죽음이 가득하다. 도덕의식이 결여된... 하나의 광신도 무리 같달까. 그러니까,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으니까. 내 탓이 크진 않을 테다. 끽해야 결혼식 절차가 좀 어긋나기나 하겠지. 제대로 진행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축사로 향합니다.)
축사로 돌아옵니다. 여물을 주던 주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텅 비어 있습니다.
세이블:(작은 농막으로 가 상자를 열어, 초와 부싯돌이 있는지 확인해 봅니다.)
초와 부싯돌 역시 제 자리에 잘 있습니다.
세이블:(챙긴 초를 평평한 바닥에 놓고, 부싯돌을 부딪혀 불을 붙여봅니다.)
탁, 탁. 돌들이 내는 마찰음과 스파크가 몇 번 일더니 촛불에 불이 붙습니다.
세이블:(일렁이는 촛불을 잠시 보다, 높게 쌓여진 짚더미에 주저없이 던집니다. 불이 잘 붙었음을 확인한다면...)
세이블:(이런 글귀는 누가 다 생각해서 적어내는지, 쉬울 것도 참 어렵게 풀어낸다 싶다. 밖에서 본 것과 달리 비좁은 내부, 장치라도 있는 듯 다른 벽돌색. 숨겨진 공간이 있다면 이 너머겠지... 그리고, 기디언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던 방법을 쓰라는 게 맞다면, 기억력 하나는 준수해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쪽을 다섯 번, 서쪽을 세 번, 다시 북쪽을 세 번, 동쪽을 세 번, 북쪽을 열 번... 신중하게 벽돌을 누른다.)
순서대로 벽돌을 누르자 둔탁한 소리가 내려앉습니다.
수상한 마을의, 수상한 주민들이 소란의 원인이 된 세이블을 이 잡듯 뒤지며 미친 듯이 발을 구르는 상황에서, 저 소리를 마주하니 심장이 떨어지는 착각도 듭니다.
샐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고 둘러보면 벽난로의 기둥이 약간 튀어나와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벽돌이 촘촘히 쌓아 올려진 기둥을 밀고 당기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필요합니다. 자연히 힘줄이 서고, 손끝으로 표면을 긁어내리며 열어젖히면… 숨겨진 공간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선 지독한 악취가 벌레처럼 스멀스멀 풍겨 옵니다.
마치 빛도 머금을 수 없이 검고 어두운 형태의 묵직한 무언가가, 세이블을 잡아먹듯 온몸을 덮은 채 바닥으로 끌어당긴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나아갈 곳은 이 ‘앞’과 당장이라도 당신을 찢어발길 것처럼 달려올 사람들이 있는 저 ‘밖’ 뿐입니다.
다만, 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강한 예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에워쌉니다.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선택은 엄연히 당신의 몫입니다.
:나아가면 해당 방의 조사는 끝나게 됩니다. 조사를 전부 마쳤다고 생각되면 나아가 주세요! ^_^
세이블:(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건, 지금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 아닌 기디언이 찾아온 마지막 날부터였다. 내 삶의 대부분엔 그가 있었으니, 그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달라진다. 되돌리고 싶다면 온전히 되찾아오는 방법 뿐이야... 적어도 나한텐 돌아올 수 없는 길이 아닌, 돌아가는 길이다.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걸 읽는 일이... 기디언을 데리고 나오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일지에 쓰인 이름, 분명 기부명단에서 본 사람의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부정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뒤바뀌지 않아. 지금은, 최악의 결과가 나오지 않게 움직여야 할 때다.기관 부분 교체페이지를 확인합니다.)
한눈에 봐도 제일 많이 펼쳐본 것처럼 페이지는 바래 있습니다.
:기관 부분 교체핸드아웃 공개합니다.
마력, 이성 등 알 수 없는 내용과 함께 주문이 적혀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신체 기관을 교환했다는 뜻이겠죠.
세이블:(끔찍하게 발전된 의료술이다...)
(책을 덮고, 조금 더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나무 탁자를 확인합니다.)
방에 들어왔을 땐 몰랐으나 가까이 오니 바로 알겠습니다.
피로 점철된 나무 탁자입니다. 되직한 액체가 켜켜이 쌓여 감히 물로도 씻기지 않을 만큼 짙습니다.
나무 탁자의 결을 만져보면 음각 문양이 파여있습니다.
둥그렇게 주변을 둘러싸는 괴이하게 구부러진 문자들, 수많은 덩굴처럼 얼키설키 엮인 비선형 자국. 이 위에 생물을 눕힌 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이블:(손도 대고 싶지 않은 탁자. 아직 이 위에 기디언이 올려지지 않았길 바란다. 그런데, 저 끔찍한 의술과 결혼식이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대외에 쓰기 좋은 핑계? 그러고 보니, 아직 기디언이 보이지 않는다. ...저 커다란 공간, 두 곳 중 하나에 있을까.유리관을 확인합니다.)
방에 들어왔을 땐 어둠에 가려져 평범한 유리관인 줄 알았으나, 어둠에 차츰 익숙해지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남달랐습니다.
세이블:(아무렇게나 뒤엉켜 널브러진 몸을 일으키고, 소리가 들려온 벽 쪽으로 다가간다. 주민들이 떠난 문 쪽을 흘긋이다, 그 목소리에 답한다.) ...기디언?
기디언:(긴 침묵이 이어지고, 벽 너머에서 몸을 끌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쇳소리 같은 숨소리를 내뱉고, 병자처럼 계속해 기침을 반복하다 짧은 문장을 꺼낸다.) ... 형이구나. 오지 말지. 약속 왜 지켰어 바보.
세이블:...! (깊게 잠긴, 갈라진 목소리에 기디언일 거란 확신은 하지 못했다. 다만, 이 마을에서 안 찾아본 곳은 여기뿐이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주길 바라서, 그 이름을 불렀는데 정말 너일 줄은 몰랐다. 드디어 네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는데, 기분은 여전히 참담하다. 누가 들어도 좋지 못 한 상태의 목소리. 이곳에서 얼마나 방치당한걸까... 내가 조금 더 일찍 찾아왔더라면...) 저주 거신다면서요. 아직 이룰 게 많은 몸이라, 길거리에 나앉을 순 없었습니다... (농담을 해도 활기 없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벽에 손을 짚고 목소리를 높여 묻는다.) 괜찮으신 겁니까?!
기디언:(제대로 웃을 기력도 없는 듯 툭 내뱉는 웃음을 뱉는다.) 어쩐지 요 몇 시간 밖이 소란스럽더라. 난 여기 도착하자마자 저주 걸기로 한 거 취소했는데. 형이 바보였어, 아무튼...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기어 이동하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는다. 목소리에 집중하려는 듯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며 대답한다.) 형. 신기한 거 알려줄까? 진짜 배가 고프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전부. 그냥 졸리기만 해 지금은. (잠깐의 침묵 후 다시 말을 이어간다.) ... 오늘 며칠이야? 결혼까지 얼마나 남았대?
세이블:왜... 왜 멋대로 취소하셨습니까. 약속했잖아요. 저는, 정말 결혼하기 직전 기디언을 데리고 도망가는 생각도 했었는데... (손끝으로 벽을 두둑, 긁듯 문지른다. 젠장... 두텁기도 더럽게 두텁네. 이 너머에 기디언이 있는데, 닿을 수도 없고 끌어안을 수도 없다. 마른 목을 축여주는 것도, 다친 곳이 없는지 온몸을 어루만져줄 일도. 작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눈썹이 구겨지고 미간이 좁힌다.) ...죄송합니다. (그날, 그냥 보내버려선 안 됐는데.누군가 찾아오기 전에 도망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랬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여전히 너의 심장엔 죄악이 박혀있다. 이제 정말 되돌릴 길은...) 오늘은 결혼식 당일입니다. 앞으로… 몇 시간 안 남았을 거예요.
기디언, 알고 계십니까...? 결혼식에... 관한 일을.
기디언:도착하자마자 이상했는걸. 환영식 이후에 눈을 뜨니 여기에 갇혀 있었고,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상하고. 이런 곳에 형을 부를 순 없잖아. (귓가에서 벽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이 너머에 있는 걸까. 확인하고 싶지만 이젠 눈을 뜨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어차피 벽만 보일 확인 대신 다시 입을 여는 것을 선택한다.) 죄송하긴. 형도 모른 거잖아... (결혼식 당일.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 결혼식이 끝나면 전부 해결될 거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고통도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좋아졌나...)
몰라. 결혼이 끝나면 무슨 일이 생겨? 노예로 팔리기라도 하나. 싫은데... 나름 곱게 자라서 일 못하는데.
세이블:저 또한 이런 곳에 기디언을 혼자 둘 순 없어요. 어떤 곳이라 한들 찾아갔을 겁니다. 물론 이곳에선 상단을 차릴 수도, 좋은 사람을 소개받아 결혼할 수도 없을 것 같지만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도감이 든다. 살아있어. 아직은 살아있다. 심장 자리에 뭐가 있던, 내가 아는 기디언은 살아있다. 더 입을 여는 것도 그에겐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겠지. 알고 있지만, 이제 그만 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라도 더 듣지 않으면... 완전히 이성을 놓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갑시다. 여기보단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혼처야, 그 말대로 찾아보면 많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보고 알아낸 것들을 전부 말해도 괜찮을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는 한계다. 혼란스러울 뿐이야. 온 세상이 재앙으로 재탄생한다는 걸 알면... ...재밌어 할 것도 같긴 하지만... 아무튼.) 기디언은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겁니다. 제가 약속할게요. (방법도 확신도 없는 말이지만, 그저 소망했다. 편안한 거짓말이 된다면 그것으로 좋고, 기적 같은 진실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기디언:나랑 형 상황은 다르지... 난 여기가 새 집인 거고, 형은 그냥 날 보러 찾아오는 방문자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찾아와준 것이 기쁘다. 자신을 위해 평생에 걸쳐 일궈온 상단과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행복한 미래를 포기할 수 있다고 단언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저 편하게 살아온 줄만 알았는데 나도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구나.) 다른 곳, 어디? 난 평생 영지 내에서만 지냈으니 밖은 잘 몰라. 형의 평생을 책임지려면 좋은 곳을 찾아야 할 텐데.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쭉 돌아다닐 거 같으면 아예... (말이 끊기고 침묵이 이어진다. 형 동생 사이에 평생 곁에 있어달라고 하는 건 욕심인가.)
(무언가 숨기고 있구나.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하지만 형이 숨기는 거라면 자신에게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 대신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린다.) ... 형, 기억나? 배우자 앞에서 나 납치해 달라고 했던 거. 원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거 아버지 앞에서도 한 번 더 해주라. (정략혼 상대를 이렇게 대한다는 건 이미 가문끼리도 이야기가 된 상황이란 뜻일 테니까. 멀쩡히 살아 돌아가서 눈앞에서 달아나줘야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해서 죽어도 성불하지 못할 거 같아.)
세이블:(이런 곳을 새집이라고 부르다니... 같은 집에서 자라왔고, 독립을 한 이후에도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 헤르모드 후작가였다. 그 누구도 아닌 널 보기 위해서. 그런 나를 방문객으로 부르다니. 상황이 이러다 한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열불이 뻗쳤다. 타의라 한들 나를 떠나간 것이 섭섭했고, 네가 남에게 귀속된다는 것이 질투났다. 애초에 너의 결혼식을 축복해 줄 마음 따윈 없었어. 이런 끔찍한 땅 위에서 고통받는 게 아닌, 화창한 하늘 아래 밝게 웃는. 이상적인 결혼식을 보았어도 마음은 불온함으로 뒤덮였을 거다. 그리도 질척한 감정이라, 이 엉망인 전야제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내 감정은 한 끗 닿을 수도 없이, 더 망칠 것 없는 최악의 결혼식이니 말이다.) 숲이 멀고 상업화가 잘 된 도시는 어떨까요. 온갖 즐거움이 가득할 겁니다. 아니면... 무역이 잘 발달한 항구 도시도 괜찮을 겁니다. 휴양지는 아니라서, 조용할 일 없이 시끄러운 바다겠지만요. (침묵의 자리를 메꾸며 하나하나, 언젠가 꿈꾸던 곳들을 나열한다. 정착하지 않고 쭉 돌아다니는 것. 모범 답안 같은 선택지다 싶었다. 그럼 질릴 일도 없이 평생 함께할 것 아닌가. 어차피 자신에겐 기디언이 아니라면... 모든 게 상관없을 것이다.)
물론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 몇 번이고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손을 내린다. 벽 앞에 무릎 꿇어앉곤 그 앞을 바라본다.) 저를 생각해 주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저와 함께함을 꿈꿔 주십시오. 기디언의 심장이 터져도, 뒤바뀌어도, 그 자리에 뭐가 들어차든 간에…. (호소하듯 울먹거린다. 이 무슨 자주 같은 고백이란 말인가. 그것도 결혼식을 몇 시간 후에 앞둔 신랑에게.)
기디언:도시도, 항구도 둘 다 좋아. 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바다를 보고 싶어. 거대한 배를 타고 타국으로 여행도 가보고 싶고. 그 모든 여정에 형이 함께했으면 좋겠어. (이뤄지지 못할 미래를 그리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던지... 이래서 사람들이 환각에 빠지나 싶다. 계속 즐거운 두 사람의 미래를 생각하고 싶으나 이젠 현실을 볼 시간이다. 심장이 터지고 뒤바뀐다는 말을 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할 리가 없으니 아마도 저게 얼마 뒤 내 미래인 모양이지. 미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심장이 터져 죽으면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3시. 저들이 결혼식이라 칭하는 의식이 시작될 시각. 서서히 밖이 소란스러워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앞으로 얼마 남았을까요.
기디언이 있는 벽 쪽에서 헛웃음이 들렸습니다.
기디언:이렇게 되기 전에 제대로 도망 쳐볼걸. 결혼하기 싫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발악이라도 해볼걸...
이딴 결혼식 따위, 망해버리면 좋을 텐데.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리 말한 착각이 듭니다.
무겁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리고 그 잠깐 들어온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게 됩니다.
이 감옥에 갇혀서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지. 제대로 눈을 뜨기가 힘이 듭니다.
마을주민:곧 식이 시작된다. 신랑만 꺼내.
벽 너머로 반항기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다 갈라진 목소리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간절합니다. 빛 번짐이 사라진 그 순간,
시선이 마주합니다.
며칠 만에야 마주 본 저 얼굴, 기억보다 조금 더 야윈 저 얼굴, 출발할 때 그가 입었던 하얀 결혼식 복장은 찢기고 바닥을 굴러 더럽혀져 있습니다.
살아있는 보석, 저것을 꺼내지 않는다면 읽었던 일지에 나온 인간들처럼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심장만 꺼내는 일이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가슴을 가르는 순간, 그의 몸 안에서 살아있는 보석이라 불리는 죄악의 덩어리가 이어진 혈관을 끊어버린 뒤,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데?
세이블:(저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은 본 적 없다. 지금껏 봐온 건 부패한 시쳇더미, 기다란 유골들, 동물의 사체와 끔찍한 작품들. 그리고 제가 휘두른 도끼에 속절없이 쓰러져 가던 인간들. 그래, 그럼 그를 고통에서 구원해 주는 방법은 이뿐일 것이다. 도끼를 높게 치켜든다. 심장을 터트리면, 다신 이런 불경한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 (내려치기도 전에, 과부하 된 몸에 힘이 빠지며 도끼가 나뒹굴어진다. 그 자리에 엎어져 쓰러질 뻔했으나, 끝없이 들려오는 비명에 정신을 다잡는다. 분명 이 의식에 관한 온갖 모독적인 문서를 읽었다. 분명 기관을 뒤바꾸는 문서에 관해서도 읽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주문이, 정말 시행될 수 있다면...)
(빠르게 몸을 돌려 유리관을 찾는다. 기디언 헤르모드! 그의 이름이 붙여진 심장! 시체건 작품이건 모든 걸 꺼내왔다면, 그의 심장도 이곳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시체 언덕 주변엔 기디언의 심장을 포함하여, 이곳저곳 보존액에 절인 신체 기관이 유리관에 담긴 채 장식되어 있습니다.
유리관 속 심장은 시간이 멈춘 듯 건물 안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작은 심장. 당신의 주먹 크기도 되지 않는 어리고 나약한 심장.
지금 순간에도 뒤에선 날카로운 비명이 귓가를 찢고 들어옵니다.
세이블:(무엇이든 밟고 올라가 그 붉은 심장을 끌어안는다. 소중하고, 섬세하게. 제 손안에서 고동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감상 같은 걸 남길 여유는 없다. 지금 들려오는 비명은 누군가의 신랑도, 바보 같은 의식의 희생양도 아닌 그 누구보다 애정하는 기디언의 목소리니까. 끝내야만 한다. 이 결혼식을, 너의 고통을.)
(제단 바로 앞에 유리관을 두고, 읽었던 문서의 주문을 기억해 내 읊는다. 기관 부분 교체 주문을 시행합니다.)
순간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온 건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마하게 불길하고 죄스러우며 추한 감상만이 찌꺼기처럼 남습니다.
:마력 10과 이성3을 지불합니다. 지불할 마력이 부족할 경우 체력을 차감합니다.
마력이 크게 빠져나간 탓인지 시야가 일순 흔들렸습니다. 정신이 쪼개지듯 머리가 아프기까지 합니다.
깜빡, 눈을 크게 감았다 뜨고 다시금 제단 위를 바라보면 비명을 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떨림은 멈춰있습니다. 색색거리는 나약한 숨결이 주변을 에워쌀 뿐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유리관으로 눈을 돌립니다.
‘살아있는 보석’은 보존액과 굴절 때문인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꺼내어진 이것을 본 순간 잠시 감탄합니다. 알알이 탐스러운 과실을 가득 품은 ‘석류’가 있습니다.
세이블:(유리 파편과 모독적인 덩어리, 흥건하고 질척한 액체 위로 도끼를 내던진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린다. 되돌아온 길. 사랑하는 나의 기디언.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훔쳐내고, 그 아래에 다시 무릎 꿇는다. 이제 되돌아가야 할 길 같은 건 없다. 비로소, 우리가 같이 나아갈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어디든지...
평생 함께하게 해주세요.
기디언:남은 제단에 묶여있는데 평생 함께해 달라는 말이 나와? (투정하듯 말을 내뱉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평생 곁에 있을게.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다른 세계에서도. 계속.
동이 트고 있습니다.
새벽의 지옥 같던 부정을 몰아내고, 한차례 새로 태어날 뻔했던 ‘기적’도, ‘저주’도 몰아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양은 여전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떠오릅니다.
잠들었던 새들이 일어나며 고요를 깨고 비상합니다. 안개 따위로 가려지지 않은 새파란 아침으로 말이죠.
결혼식을 끝내주게 망친 후 맞이하는 아침이라 그런가? 쾌청한 푸르름이 완벽하게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