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그게... 대체 무슨...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방금 일어난 건... 살인? 이미연시 게임에서, 그것도 히로인 격인 인물이 주인공을... 여전히 상황파악이 덜 된 상태로 난간에 다가간다. 밑을 내려다보면 시체가 있을까...?)
오광철:말 그대로인데, 왜? 형만 입 다물어주면 아무도 내가 피기를 죽인 걸 모를 거야. 응, 형만 조용히 있어준다면... (고개를 기울이며 같이 난간에 다가가 아래를 살핀다. 형이 보기에 좋은 풍경은 아닌 거 같은데...) 여기서 고개를 내밀면 형이 범인으로 몰릴걸. 봐. 아래에 사람이 모이고 있어.
난간 아래엔 분홍빛 머리카락을 퍼트린 채 쓰러진 주인공이 보입니다.
시체의 상태까진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아스팔트 위로 붉은색이 번지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백지혜:으윽... (처참한 주인공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난간에서 멀어진다. 대체 난 왜 여기에 올라와선...! 파랗게 질린 얼굴을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어 움직여 오광철을 바라본다.) 그건 마치... 협박으로 들리는군요.
왜... 왜 죽이신 겁니까? 진짜 죽인 거에요? ...광철이?
오광철:(같이 난간에서 멀어지며 손을 잡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든다.) 협박처럼 느껴졌어?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반대쪽 손으로 뺨을 감싼다. 손가락으로 살살 뺨을 간지럽힌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죽였어. 조금 다퉜거든. 형은 해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백지혜:(반사적으로 잡힌 손을 바라본다. 뺨에 닿은 이질적인 감촉에 놀란듯 바로 시선을 옮긴다. 피하지도 떼내지도 못한 채 굳어있길 잠시, 정신을 차린듯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곳이 게임일 뿐인 세계더라도 살인 후 도주는 위험해. 그리고, 나와는 상관 없을 삶을 살아갈 사람이겠지만... 별개로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건 사실이니까.) 실수였다고 하면 될 거에요. 아직 학생이니까. 제가 봤다고 하겠습니다. 살짝 밀쳤는데... 그대로 중심을 잃은 거잖아요. 자수하죠.
오광철:도와? 자수?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그렇게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고의가 맞는데 어떻게 실수라고 거짓말해. 나는 형과 함께 도망치는 게 좋아. 그러고 싶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이번엔 그 손을 자신의 뺨으로 이끌고 손바닥에 머리를 기댄다.) 개학하기 전까지 6일만 어울려줘. 중간에 들켜도 상관없으니까.
백지혜:거짓말이라도 해야죠! 안 그러면... 광철의 인생이 엉망이 될텐데. (평소보다 더 잦고 가까운 스킨쉽에 놀라 숨을 들이킨다. 설마 지금 얼굴로 꼬시는 건가? 같이 도망가자고? 세계가 고르고 골라 선택한 아름다운 얼굴을 저렇게 쓰다니... 눈 밑이 일그러진다.) 그러다 들키면 정말 살인이 될 겁니다. 도망까지 쳤으니 명백한 고의로요... 대체 어쩔 생각이십니까? 왜... 왜 저랑, 도망가고 싶은 건데요?
오광철:난 그냥 싫어하는 사람을 밀쳤을 뿐인데, 왜? 이미 엉망인 인생에 빨간 줄 하나 생긴다고 뭐가 바뀔 거 같아? (조폭 생활하다 감옥에 들어가나, 지금 들어가나 똑같은 건 맞으니까. 일그러지는 표정과 대비되는 눈웃음을 짓는다.) 형이 고3이 되고 바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추억을 만들고 싶어. 형이 아니면 안 돼. 좋아해. (시선을 위로 올린다. 표정을 살피다가...) 농담.
아무튼 공범이 되어주면 안 돼? 형에게 피해 가는 일 없도록 할게.
백지혜:싫어한다니...? (두 사람은... 이어지는 운명 그런 거 아니었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게임 장르가 호러 추리 스릴러로 변했나? 대화할수록 이해가 가긴 커녕 혼란스러움만 증가되어간다. 그에 더해 좋아한다고 한 후 농담이라고 말하는 악질적인 장난에 두 다리가 풀릴 뻔 했다. 이도저도 아닌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오광철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이대로 있으면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겠지. 그는 자수할 생각이 없아 보이니까, 용의자가 되어 그대로 잡혀갈테고... 우선 자릴 피하고 얘길 들어보자. 절대 같이 도망가는 게 아니야.) 어디로 갈 생각인데요?!
오광철:응. 싫어했어. 엄청~ (마치 오늘 아침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반항 없이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면...
백지혜:...? (우리 광철이...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피기인지 뭔지가 많이 괴롭혔던 걸까...) 우선 알겠습니다. 집엔 돌아갈 건가요?
2
오광철:응. 가야지. 형 집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까. (사람을 죽였다고 내칠 가족이 아니라는 점은 이럴 땐 참 좋은 거 같아.) 우리 집으로 오면 형이 놀랄 테니까 매일 형 집으로 찾아갈게.
백지혜:(그럼 이건 도망이 아니라... 그냥 같이 노는 거잖아. 그것도 더 자주, 더 친근하게 말이다. 영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린다.) ...저는 두분이... 서로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담 앞에 다다라선 어색히 뱉어낸 질문. 몇초간의 정적을 둔 후 말을 이어간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오광철:사랑? 나랑 피기가? (뒤따라 달리며 고개를 기울인다. 한참을 생각하다 무언가 기억난 듯 아.) 그랬었지. 그랬던 거 같기는 해. 아마 그랬을 거야.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 것일지, 관심 없는 건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성격 탓인지 애매한 대답만을 남기고 고개를 든다.)
... (주인공을 죽여도 이 세계는 유지되는구나. 그것도 더 아름답게. 오광철의 옆이라 그런걸까... 여전히 심란한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간다.) 생각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요. 전 항상 광철을 돕겠습니다. ...제가 형이잖아요. (그러니까... 의지해도 된다고. 그런 말을 작게 중얼거리곤 애써 옅은 웃음을 짓는다.)
오광철:무슨 생각? 자수하라던 거? (아마 그럴 일 없을 텐데. 그래도 성의를 봐서 고개만 끄덕인다. 항상 날 돕겠다는 말이 기쁘기도 하고...) 형도 죽이거나 괴롭히고 싶은 사람 있으면 연락해. 도와줄게. (그리곤 왼쪽, 직진, 신호를 건너서 이번엔 오른쪽. 익숙한 듯 백지혜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앞서 나아간다.) 형 집 이쪽 맞지?
백지혜:없습니다. 아직은. (단칼에 대답한 후 그의 뒤를 따라 길을 걷는다. 익숙한 골목 귀퉁이, 담벼락, 벚꽃나무... 멍하니 그런것들을 눈에 담는다.) 아... 예. 데려다 주시려고요?
오광철:'아직은'이라는 건 언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지? 기다릴게~ (뒤돌아 걸으며 상대가 무엇을 보는지 관찰하고 시선이 가는 곳을 따라간다. 형은 집에 갈 때 이런 걸 보며 걷는구나.) 응. 앞으로 6일 동안 내가 집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올 거야. 괜찮지?
백지혜:보통 죽이고 싶은 사람은 안 생기는 게 좋죠... (이게 착한후배인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인지... 작은 한숨을 내쉰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걸까...)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6일이 다 지난 후엔 어쩔 생각이십니까?
오광철: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나처럼 사랑하던 사람을 죽이고 싶어질지도... (주인공 생각에 묘하게 미간이 좁아진다. 형과 있는데 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응? 6일 뒤엔... (곰곰.) 별일 없으면 개학을 하겠지? 나는 2학년이 되고, 형은 3학년이 되고. 별일이 생기면 생기는 거고. (계획없음!)
백지혜:그럴 일은 더더욱 생기지 않을 것 같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광철아... 가까이 다가가 주변을 슥 살핀 후 속닥인다.) 죽였다는 말 당분간 꺼내지 마시구요... (뭔가 계획이 있는줄 알았는데. 진짜 방학동안 노는 것 뿐인가? 다시 조금 간격을 두고 길을 걷는다.) ...들키는 게 두렵진 않습니까?
오광철:나도 이런 일 없을 줄 알았어.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표정은 밝기만 하다. 당분간 죽였다는 말을 꺼내지 말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한다.) 안 두려워. 내 삶엔 더 무서운 일들이 많기도 했고, 감옥에 가더라도 이 6일간의 기억만 있으면 어찌저찌 살 수 있을 거 같고.
형은 무서워? 내가 들키는 거.
백지혜:(그러니까 더더욱. 평범한 가족과 평범한 삶이 없던 네게 사랑만큼은 평범했으면 했다. 아니, 모두가 바라볼 미연시 게임 속 메인 러브스토리가 평범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가장 큰 가치를 얻고 살만하지 않나 싶었다. 너라면. 너라서 납득했었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 당연하죠. 제가 광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아시잖습니까.
오광철:(앞서 걷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한 집 앞에서 완전히 멈춘다.) 형이 날 아껴줘서 기뻐.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본다. 만족스러운 듯 집을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백지혜를 향해 몸을 돌린다.) 기뻐서 그런가. 유독 형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짧은 거 같아. 여기 맞지?
고개를 들면 하얀 외벽 위에 짙은 회색 지붕을 올린 2층짜리 단독주택에 도착합니다.
대문의 창살 너머로 보이는 마당엔 노란 꽃이 심겨있고, 그 사이로 검은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놉니다.
백지혜:(책 제목이 좀... 흐릿한가? 나중에 다시 받아와야지. 우선은 오광철을 훈계하자. 소파 근처로 가 조용히 속닥인다.) 자러 왔어요?
오광철:어차피 할 일 적은데 다 끝내고 노나 지금 놀고 나중에 끝내나... (반 바퀴 굴러 벽 바라보게 등져 눕는다.) 형도 나중에 하고 누울래? 여기 소파 푹신해.
백지혜:(조금 갈등... 하다가 결국 소파에 앉는다. 눕지는 않고 오광철을 받침 삼아 기댄다.) 아 참. 저 오늘 꿈에 광철이 나왔습니다.
오광철:응? 내가? 내 고백이 통했나... (헛소리 후 기댄 게 불편한지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꿈틀거린다.) 나 꿈에서 뭐 했어?
백지혜:고백 안 했잖아요. (헛소리! 하는 입 찰싹 때린다.) 뭐... 별 거 안 했습니다. 그냥 평소랑 비슷했어요. (꿈에서 그 애를 보듯 웃던 오광철... 게임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나? 그래서 인물에게 느끼는 감정이 뒤바뀐 거라던가. 혹시 광철은 날 죽이고 싶었던 건가... 급 오싹해진 기분에 자리서 일어난다. 일해야지... 우선 '뫼비우스와 영원의 상관관계'부터!)
오광철:농담이지만 좋아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야. 입술 삐죽이다 이쪽도 일어난다. 정리해야지...)
어째서 사랑은 사랑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수많은 가설이 있으나 한 가지의 설이 유력하다. '살다[生]'라는 글자와 접미사 '-앙'이 결합되었다는 말. 그렇다면 사람은 곧 삶이라 할 수 있다. 살아가기에 할 수 있는 것이 곧 사랑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음절을 풀이하니 더욱 낭만적인 글자가 된다. 놀랍게도!
그리하여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 행복한가?
백지혜:(누가 미연시 게임 아니랄까봐. 책도 이런 것만 있군... 다음은... 카운터로 간다.) 저, 이 책 제목이 잘 안 보이는데요.
기차는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가만히 누워있던 ◼◼◼ 모형은 춤을 추지요. 앞발이 부◼진 공룡은 손뼉을 치려고 기우뚱거립니다. 자그마한 고◼◼ 인형은 통통한 꼬리를 흔들었고. 그 옆에서 플라스틱 강아지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꼬리가 흔들리는 것을 주시합니다.
상자 밖의 ◼◼등을 켤 수는 없지만 괜찮아요. ◼◼의 집에는 조그마한 건◼◼가 붙어있으니까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반짝거리는 불빛이 아◼◼겨집니다.
가장 푹신한 담요의 위에서는 ◼◼ ◼◼이 앉아있어요. 모든 ◼◼이 그 자리에 놓◼◼는 걸 인정하였지요. 아이가 가장 아끼는 ◼◼은 참 예뻤습니다. 목에는 검은색 넥타이가 묶여있었고. 부드러운 털은 ◼◼기만 해도 포근해졌으니까요. 장난감 왕국의 ◼◼님이 된 것은 당연하였어요!
도서관 한 편. 다리를 꼬고 앉은 모양새는 참 객관적으로 보기 좋습니다만, 전혀 도서관으로 보이진 않는 모습입니다.
그야 앉은 이후론 책장에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앉아서. 계속 백지혜 당신만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오광철:아 맞다. 여기 2층은 북카페도 겸하고 있어서 뭐 마실 수 있댔어. 올라갈래?
자연스런 데이트 권유입니다!
백지혜:(...방금 읽었지? 데이터 삑사리난 동화책을. ...이상한 걸 눈치 못 챈 건가? 혼자서만 눈치를 보다가 들려온 말에 눈을 깜빡인다.) 아, 좋습니다. 마침 갈증이 있던 참인데.
오광철:목마르면 말하지. (책의 이상한 점은 눈치채지 못한 듯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뭐 마실래? 형이 놀아주기로 한 거니까 6일. (아.) 이제 5일 동안 하는 건 다 내가 살게.
백지혜:어, 진짜로? (좋은데? 따라 계단을 오르며 후배 지갑 털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그럼 전 딸기라떼로 하겠습니다!
오광철:응 진짜로. (이래 보여도 나름 무서운 집에서 태어난 덕에 부족하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다. 5일 동안 데이트 비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 지갑 안에서 카드 꺼내 보여준 뒤 카운터에서 딸기 라떼 두 잔 시킨다.) 형 이거 좋아해?
백지혜:(주인공도 이 재력으로 꼬셔버린 거지? 무섭다. 세계가 고르고 고른 히로인. 생각과는 달리 기분 좋게 말린 미소를 짓고선 자리에 가 앉는다.) 네. 부드럽고 달콤하잖아요. 광철은? 따로 좋아하는 메뉴 없습니까?
오광철:나는... (좋아하는 것을 말하려다 멈춘다. 그리곤.) 형이 좋아하는 거 좋아해. 남은 방학 동안 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많이 알아가고 싶어.
주인공을 꼬신 게 아니라 주인공이 꼬신 겁니다.
이 세상의 장르는 미연시니까요!
백지혜:(그거나 그거나.) 이미 꽤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본 후 시선을 거둔다.) 역시 이상합니다. 저를 대하시는 태도나... 그날 있던 일이나. 말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오광철:아니야. 잘 몰라. 형이 좋아하는 것들은 항상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었어. (가늘게 뜬 눈 따라 하며 이상한 표정 짓다가... 그만두고 딸기라떼 휘적인다.) 뭐가 이상해? 형이 본 게 전부야. 그래도 정 알고 싶다면. 음... (의자에 등을 기대곤 손가락 쫙 펴서 보인다.) 궁금한 거 하나 답해줄 때마다 소원 한 개.
백지혜:볼 수 없는 곳이라니. (뭘 의미하는 걸까. ...각자의 교실? 혹은 집? 이쪽은 의문감에 점차 표정이 더 이상해진다. 빙빙 돌아가는 빨대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올린다.) 제가 본 건 극히 단편적인 사건이었으니까요. 좋습니다. (애가 소원을 말해봤자 얼마나 거창하겠어.) 왜 싸우셨습니까?
오광철:응. 볼 수 없는 곳. 나는 쉬는 시간에도, 방과 후에도 계속 피기랑 있었으니 형이 어떻게 지냈는지 잘 몰라. (어.) 싸운 이유... 음, 으음. (첫 질문부터 곤란한 게 나왔다. 빨대로 음료를 한참 더 휘적거린다. 긴 정막이 1분 정도 이어지고 겨우 말을 골랐다.) ......... 바람피웠어. (둘 중 누가?)
백지혜:그랬었나요? (그래도 나름 학교에서 오고가며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딸기라떼를 쭉 들이킨 후 함께 침묵한다. 미연시 게임에서 바람이라... 하긴, 살인도 했는데. 그럼 역시 죽임 당한 쪽이?) 바람 피우고 죽이기까지 하면 너무하지. (혼잣말...) 그럼 두번째. 왜 저에 대해 궁금해 하십니까?
오광철:응. 그랬어. 잠깐 마주친 것들로는 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전부 파악할 수 없어. (혼잣말 무시한다... 누가 바람을 피웠을까?) 형네 엄마에게도 말했잖아. 형은 내게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궁금하고, 좋아해. 이번 고백은 농담이게 진짜게?
백지혜:(마셨던 딸기라떼가 다시 역류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그 점이 이상하다는 거야, 잠깐 마주친 사이, 조금 친한 선후배 사이, 그냥 나 혼자 멀리서 지켜봤을 뿐인 사이에서 갑자기 유일한 사람이 됐으니. 뭔가 일이 일어났던 게 분명한데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다.) 농담으로 알아두겠습니다.
이번엔 조금 상관 없는 질문인데, 광철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광철:(반응을 살피듯 말을 마친 뒤 한참 동안 상대를 바라본다.) 응. 유일한 사람인 건 맞지만 좋아한다는 건 농담이었어.
... 사랑? 나도 하긴 하지만 굳이 필요한가? (사랑이 가치인 세상에서, 사랑의 필요에 의문을 가지며 오늘 봤던 것 중 가장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시계로 시선을 옮긴다. 어느새 오후 6시.) 보고 싶은 것도 봤으니 슬슬 돌아갈까?
백지혜:혹시 평소에도 그런 장난 많이 치십니까? (어느덧 다 비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대화 주제가 이상해서 였는지, 평소보다 더 목이 탔나보다.) 그렇군요. 어떤 책에서 사랑은 곧 삶이라길래. 광철의 의견이 궁금했었습니다. ...네, 돌아가죠. (보고싶었다는 건 책? 잔 두개를 들어 반납대에 올려놓고 가게를 나선다.)
오광철:피기에게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대답만 남기고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랑이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으니 사랑할 수 있는 건 맞다고 봐.
오광철:나 안 그래도 오는 길에 경찰 여럿 만났는데. 밖에서 매번 상대하기도 귀찮으니 오늘은 그냥 집데이트 할래~
허락도 없이 들어와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뒹굴기 시작합니다. 고양이 귀여워~
백지혜:(뭔가 억울.............) 광철은 장래희망이 있으십니까?
오광철:장래희망? (고개 저으며 고양이 만지작댄다.) 없어 그런 거.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데... 형은?
백지혜:저는 변호사입니다. (소파 옆에 앉아 다른 고양이의 턱을 긁는다.) 이 일로 제게 범죄 이력이 생긴다면 물 건너갈 꿈이죠. (여긴 게임 속이지만... 막연한 목표 정도는 정해둬도 될 것 같아 막연히 생각한 진로였다. 엑스트라가 나중에뭐 하는지 정돈 굳이 신경 안 쓸 것도 같고.)
오광철:변호사? 어울린다. (에잇. 고양이 뺏어온다.) 형에게 범죄 이력이 생길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사람을 죽인 건 나니까. (나는 나중에 무엇을 하면 좋지? 고민과 함께 고양이를 비비고 있으면 어느새 고양이는 발톱으로 얼굴을 핥퀴고 멀리 도망간다. 고양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긁힌 뺨 위에 손을 올린다.) .... 나중에 난 모범수나 될까 봐.
백지혜:광철과 함께 도망치고, 진술에도 거짓말을 했는데... (틀렸어. 난 이미 변호사 실격이야. 혼자서 쓸쓸히 꿈을 포기하곤 따라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러게 자수하자니까. (물론 자신도 방금 사건의 진실을 은폐해 버렸지만. 테이블 위 구급상자에서 소독약과 밴드를 꺼낸다.) 오늘은 뭐 할 건가요?
오광철:이렇게 하자. 형이 도망친 건 범인이 인질로 잡아간 거고, 거짓말을 한 건 상황을 잘못 봤던 거야. 어차피 진실을 아는 건 우리뿐이니 들켜도 나만 입 다물면 돼. (당연히 자수할 생각은 없다. 구급상자를 꺼내는 것을 보곤 상체를 일으켜 앉고 뺨을 내민다.) 원래는 오늘 공원에서 대통령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집데이트가 됐으니까. (곰곰.)
1번, 영화 보기. 2번, 요리하기. 3번, 기타. 4번, 지금이라도 대통령실로 가기.
백지혜:되도록이면 그렇게 말할 상황도 오지 않는다면 좋겠군요... (여기까지 왔으니 자수도 글렀고, 그가 경찰에게 붙잡히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다. 신경쓰이는 점도 한둘이어야지 말이야. 소독약을 솜에 적신 후 핀셋으로 집어 상처 부위를 톡톡 두드린다.) 으음, 영화보기가 적당해 보이는군요! 대통령 먹이주기는 따지자면 불법이에요. (연고도 바르고 밴드가지 챱! 짠~ 상처난 남주인공 완성~)
오광철:나도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럴 상황은 오지 않을 거야. (솜이 닿으면 눈을 찡그린다. 따끔거려... 먼저 귀찮게 굴어서 벌받은 건 자기면서 괜히 고양이를 향해 찌푸린 표정 짓는다. 섞인 세 마리 중 누군진 모르겠지만.)
... 대통령 밥 주면 안 돼? 왜? 그럼 대통령은 평생 굶겠네. (상처 난 남주인공은 리모콘을 찾아온다. 집주인님 넷○릭스 틀어주세요~)
백지혜:(악질적인 농담도 자주하고 주인공까지 밀어죽인 녀석이지만 고양이에게 할퀴면 아프긴 한가보아... 찡그려진 얼굴이 괜히 만족스러워 히죽 웃고는 쿠션을 찾아 오광철에게 안겨준다.) 음식 흘리고 먹는 사람이 많아서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두둥) 뭐 볼래요? 로맨스? 스릴러? 개그?
오광철:(쿠션을 안고 소파에 푹 기댄다. 뺨에 붙은 밴드의 감촉이 신경 쓰여 테두리를 긁덕이며 넘어가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못 고르겠다.) 로맨스 빼고 아무거나~ (그리고 일어나더니 자기 집 마냥 냉장고를 열어본다. 영화 보면서 먹을 간식이 있을까?) 형은 오렌지, 자몽, 우유?
백지혜:(그럼 범죄 스릴러로... 내용은 실종된 딸을 찾는 성질 나쁜 아빠가 주인공인걸로 할까. 어차피 오광철은 영화 잘 안 볼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저는 오렌지로 부탁드립니다. 옆에 있는 케이크도 꺼내오시면 좋고요.
오광철:(범죄 스릴러. 어쩐지 집안 어른들이 생각나는 장르라는 생각과 함께 오렌지 쥬스와 케이크, 컵과 포크를 챙겨 돌아온다.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놓은 뒤 다시 소파에 기대면... 잘 준비 완료!) ... 형은 무슨 케이크 좋아해?
백지혜:(잘 건가보군... 컵에 쥬스를 적당히 따른 후 케이크를 조금 덜어 입에 넣는다.) 으음, 고르자면 과일 케이크를 좋아합니다. 버터크림이 들어간 거나, 초콜렛 케이크도 맛있지만 역시 상큼한 과일과 생크림의 조합을 다시 찾게 된달까요... 그중에서도 딸기케이크를 제일 좋아해요. (다른 포크로 조금 더 덜어 오광철의 입가에 댄다.) 광철은?
오광철:(자려는 마음을 먹고 나니 바로 하품부터 나온다. 입가에 다가온 케이크를 받아먹고 느릿하게 턱을 움직인다.) 나도 딸기 케이크가 좋아. 이건 형이 좋아하는 거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초콜렛은 너무 달아서 별로야.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싫어하진 않지만, 케이크로 먹을 바에는 차라리 그냥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더 좋아. (컵 가리킨다. 마실 것도 줘.)
백지혜:취향이 맞는 점을 찾았군요. (기념으로 케이크 위 딸기는 후배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다시 포크로 콕 찍어 입에 갖다댄 후 먹는걸 확인하면 잔을 들어 손에 쥐어준다.) 그렇게 취향이 확고하면서, 어제는 왜 애매한 대답만 하셨습니까?
오광철:둘 다 좋아하는 걸 찾아서 기뻐. (딸기와 음료까지 먹고 나면 단 음식, 적당히 어두운 실내와 소음. 긴장까지 풀리니 눈이 다시 느릿하게 감긴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이미 많이 받아서 질렸어. 그러니 형이 좋아하는 게 뭔지 배우고 지금부터 그걸 좋아하려고. (......하품!) 영화 잘 보고, 잘 자.
백지혜:(고개 들어 자는 모습을 관찰하다가, 영화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어제도 그렇고, 잠이 많다고 해야할지... 집중력이 낮다고 해야할지. 좋아하는 걸 배우겠다는 사람치곤 큰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값만 입력해서 과정이 생략된 수식 같달까... 자는 오광철 어깨에 머릴 기대곤 눈을 깜빡인다.) 네에... 안녕히 주무세요, 광철.
영화가 끝나고 먹었던 그릇들도 치우고.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오광철이 눈을 뜹니다.
발등 위로 까만 그림자가 늘어지는 걸 발견하고 창문을 살피면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보입니다.
... 원래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나?
부모님에게 연락이 옵니다.
갑자기 출장이 잡혀 내일까진 못 들어온다네요.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타이밍 좋게 광철이 말합니다.
오광철:시간도 늦었는데 나 형이랑 같이 자도 돼?
불건전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군요...
그렇게 잤는데도 또 잠이 오나...
백지혜:(그렇게 잤는데도 또 잠이 오나...) 집에 안 들어가도 됩니까?
오광철:괜찮아. 하루 안 들어온다고 걱정할 사람들도 아니고. 된다는 거지? (제 집처럼 자연스럽게 2층으로 올라간다.) 잠옷 빌려줘.
백지혜:안될 건 없습니다만... (거실의 시계를 빤히 바라보다가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방 문을 열어 대충 앉혀둔 뒤 옷장을 뒤적인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도 광철의 꿈을 꿨어요.
오광철:(어깨너머로 옷장을 구경하다가 적당히 편해 보이는 옷을 찾는다. 나 이거.) ... 오늘도? 좋아한다는 농담은 내가 아니라 형이 해야 했나.
백지혜:(앗. 더 귀여운 거 주려고 했는데. 옷장을 닫고 침대로 가 앉는다.) 좋아해서 꾼 꿈이라기엔... (지긋... 오광철을 빤히 바라본다.) ...혹시 과거로 돌아간 적 있으십니까?
오광철:(더 귀여운 거 줘도 입었을 텐데. 제자리에서 받은 옷으로 갈아입고 원래 입던 옷은 의자에 대충 걸어둔다.) 과거? (곰곰. 도리도리.) 돌아갈 수 있으면 아까 먹은 케이크 한 입만 더 먹고 잤을 텐데. (맛있었어.)
백지혜:소박하시긴! (그럼... 그냥 이상한 꿈이었나? 그런 것 치고 굉장히 생생했던 것도 같은데.) 얼른 자서 일찍 일어나는 학생에게 또 하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옆자리를 팡팡)
오광철:내가 좀 소박하긴 하지. 이런 사소한 일에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네에. 침대 위를 무릎으로 기어 옆자리로 들어간다.) 오늘도 내 꿈 꿀 거야?
백지혜:(막살 사람 하나 더 들여놓으니 조금... 좁은 것도 같네. 어정쩡히 누워 고개만 옆으로 돌린다.)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바로 옆에 있으시니 직접 찾아와 주셔도 좋고요.
오광철:그럼 나도 찾아갈 수 있게 노력해 볼게. 꿈속에서 길을 찾는 건 처음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홀로 잠을 청하던 방이었는데. 오늘은 한 사람이 아닌 둘이 되었습니다.
멋대로 남의 집을 차지하고. 뻔뻔스럽게 굴고.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했는데 왜 미워할 수 없을까요.
백지혜:(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다가 기지개를 쭉 편다. 새벽에 한 번 깨서 그런지 영 개운치 않네.) 광철, 일어나요. (옆자리 사람을 살살 흔든다.)
오광철:응? 어......... (눈 뜬다. 시간 살피고 다시 눈 감으며 등을 돌린다.) 방학인데 좀 더 잘래... (오전으로 착각한 듯.)
백지혜:여기서 얼마나 더 주무시려 그럽니까. (등 돌린 몸을 다시 뒤집어 또 한 번 흔든다.) 밤 아홉시에요. 안 들어가면 슬슬 걱정받을 걸요.
오광철:... 밤? (벌떡. 일어나서 창밖을 바라본다. 잠이 덜 깬 눈을 애써 비비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오늘 데이트 일정 망했어... 오늘은 인형가게에 가려고 했는데.
백지혜:저도 이렇게까지 푹 자버릴줄은 몰랐습니다. (부모님은 왜 안 깨워줬지...) 참 계획적인 데이트 일정들이군요. 아무튼, 내일 가면 되잖아요.
오광철:왜 이렇게 잤지. 피곤했나... (눈 비비고 기지개.) 안 돼. 내일은 놀이공원 예약했어. 이제 더 계획 넣을 곳 없어. 인형 가게는 이제 못 가겠네. (아쉬운 듯 창밖만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뒀던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 집에 갈래. 바래다줘.
백지혜:(음? 내 의견 없이 이미 예약했다니. 딱히 할 일이 있던 건 아니지만...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작게 웃는다.) 그럼 나중에라도 가면 되죠. 아무리 3학년이라지만, 하루정도 못 내겠습니까. (물론 오광철이 감옥에 안 가게 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지만 말이야...) 밖에 비오니까, 우산 빌려 드리겠습니다. (자신도 외출복으로 환복한다.)
오광철:(하지만 형 방학 일정 없잖아? 6일 다 나랑 놀아주기로 했으니까.) 형이 3학년 되고 바쁘다고 범죄자랑 연락 끊을지 누가 알아. 내가 약속받은 건 이번 봄방학이 전부인데. (어쩐지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물론 감옥에 갈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찾아도 우산은 하나뿐입니다. 둘이 같이 써야겠네요...
백지혜:(썸녀? 살인 후 목격자에게 6일 내내 놀아달라고 부탁한 깡에 추후 일정 잡는 건 왜 조심스러운건데.) 그럴리가요. 연 끊을 거였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았죠. 다시 말하지만... 전 나름 광철을 아끼고 있었습니다. (현관 뒤적뒤적...) 우산이 하나 뿐인데... 괜찮겠습니까?
오광철:아껴준다니 기쁘긴 한데. 형이 끊지 않으려고 해도 상황이라는 게 있잖아. (뒤적이는 거 빤히...) 응 괜찮아. 나 비 잘 맞아서 우산 없어도 돼.
돌아가는 길, 하나의 우산을 쓰고 나란히 길을 걷습니다.
찰박이는 소리가 울립니다.
가끔 웅덩이가 있을 때면 보폭을 크게 하고,
좁은 골목을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한쪽으로 몸을 붙이고.
그렇게 한참이나 걷다 보면 어느새 우산엔 하얀 꽃잎이 얼룩덜룩 붙어 있습니다.
광철은 우산을 핑그르 돌려 꽃잎을 전부 털어냅니다.
오광철:형은 무슨 계절 좋아해? 난 봄이 싫어졌어. (벚꽃 귀찮아...)
백지혜:(팔랑팔랑 떨어지는 꽃잎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짧게 핀 것 같은데, 벌써 다 져버리다니 아쉬운 기분이 든다.) 저는 겨울을 가장 좋아합니다. 추워지면 사람들은 더 따뜻해 지려고 하잖아요. 난방을 튼다거나,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거나... 사람과 모여있다던가. 그게 포근한 기분이 들어 좋습니다.
오광철:1년 내내 겨울이면 좋겠다. 형이랑 붙어있게. (꽃잎을 다 털어낸 걸 확인하고 우산을 상대에게 넘긴다. 네가 들어.) 나도 이제부터 겨울이 좋다고 할래. 봄에서 제일 먼 계절이기도 하고, 형 생일이 있는 계절이기도 하고...
생일 축하해. 내년 분의 축하 미리 해줄게.
백지혜:그럼 추워서 다른 사람들은 싫어할걸요. 빙하기도 아니고...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든다. 불만있는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는다.) 멀다니, 겨울 다음엔 봄이지 않습니까. 광철은 봄이 싫다고 하셨지만... 전 나름 좋아합니다. 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계절이기도 하니까요.
(생각해보니 학교 친구들한텐 생일 축하 받는 일이 드물었지. 겨울 방학 기간이라서...) 감사합니다... 광철에겐 처음 듣는 축하군요.
오광철:추우면 더 붙으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우산 안쪽으로 들어가며 어깨 위에 머리를 올린다. 상대에 비해 자유로운 팔로 허리를 감싼다.) 하지만 사람들은 봄을 시작의 계절이라고 하는걸. 그럼 겨울의 난 죽은 거야? 그게 싫어.
아. 나 처음 축하해 줬어? 1살의 백지혜, 생일 축하해. 2살의 백지혜도... (밀린 19번의 축하를 보낸다.) 형이 어른이 되면 지금과 많이 다를까?
백지혜:(허리를 감싸 안아오는 손길에 흠칫 몸을 떤다. 어깨를 기댄 건 그렇다쳐도, 이건 정말 가까운 거리감 아닌가. 꼭... 사귀는 사이처럼.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악질적인 고백만 하면서 이런 스킨쉽이라니...!) 새,새학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왜, 광철도 저랑 처음 만났을 때 봄이었잖습니까. (꿈에서 본 표정이 떠오른다.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투신한 광철은... 언제나 그런 표정이었지. 문득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춘다.) 그럼... 죽은 게 아니라 잠깐 잠든 걸로 합시다. 잠깐 잠드는 계절이요.
(길고 긴 축하를 받을 때 마다 19번의 감사합니다. 를 꼬박꼬박 덧붙인다.) 글쎄요. 잘 상상은 안 가지만... 지금보다 멋질 건 확실하죠!
오광철:(몸을 떨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팔에 힘을 줘 더욱 달라붙는다. 싫어하는 반응이면 바로 떨어졌겠지만 이 반응은 싫어하진 않는 거 같지...?) 새 학기라고 유난 떠는 것도 별로... 내게 봄이 좋았던 점이라곤 형과 만났다는 것 밖에 없어. (시선을 마주치면 눈가를 휘어 접는다. 이러는 게 익숙한 듯이...) 잠든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낫네.
지금보다 멋지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전부 형에게 반해버리고 말 거야. 못생겨지도록 노력해. (잠시 고민하다가.) 몇 살까지 살고 싶어? 그것도 미리 다 축하해 주게.
백지혜:(경직된 채로 어정쩡히 걷고, 우산도 몇 번이나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다잡는다. 보기 좋게 웃는 얼굴이나, 하는 행동이나... 이거 완전 선수 아냐? 미연시 남주인공 아니랄까봐... 같은 생각을 해놓곤 막상 마주한 얼굴은 따라 티없이 웃고 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비관적인 건 좋지 않습니다. 좋은 점은 더 찾아보면 많을걸요. 기간한정 디저트들은 봄에 더 맛있다거나, 꽃구경도 할 수 있고요. (사소함)
그게 왜 안 됩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부 반할 리는 없지만, 한 두명 정도 반해주면 감사하죠. 연애는 대학가서 하라고 공부만 하고 살았단 말이에요. (딱히 연애에 큰 관심도 없긴 하지만... 그대로 잠깐 침묵한다. 그 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아까보단 짧은 침묵을 두고 다시 입을 연다.) 99살.
오광철:(매달려 있느라 어정쩡한 걸음에 따라 흔들린다.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농담을 꺼낸다.) 형이 바보 짓 해서 옷 다 젖었어. 이거 나중에 청구해야지. (하지만 딸기는 겨울에 나오는데. 난 꽃구경도 좋아하진 않고. 사소한 이야기들에 반박하기보단 가만히 목소리를 듣는 것을 택했다.) 응. 비관적이지 않게 살아볼게.
(연애는 대학 가서... 2년 기다리란 뜻인가?) 80번 더 축하하려면 돌아가는 동안 서둘러야겠네...
80번의 축하를 건네고,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광철은 어느 길목에 멈추어 섭니다.
오광철:거의 다 왔으니까 이젠 혼자 갈게.
그렇게 말하며 우산 밖으로 광철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마치 마법처럼 비가 멈춥니다.
빗소리 가득하던 세상이 고요해지고, 서서히 달빛이 들기 시작합니다.
오광철:내일도 데리러 올 테니까. 뭐 타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둬.
광철은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강요한 뒤 손을 흔듭니다.
자, 돌아갑시다.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 게 아니라 홀로 걷는 걸음이었으니 갈 때보다 올 때가 훨씬 빠른 건 당연합니다.
백지혜:덤이야말로 승리의 증표라고요. 밑에있는 건 그냥 후배 돈으로 산 아이스크림이고. (못 줄 것도 없긴 한데...) 그럼 저도 한 입 주십시오.
오광철:그런가. 음... (납득함. 딸기와 초콜릿 맛이 섞인 구슬 아이스크림 한 스푼 크게 떠서 내민다.) 아~
백지혜:(납득하네... 그보다, 이렇게 먹어야 하는 건가? 잠깐 망설이다가... 그대로 받아먹는다.) 맛있네요.
오광철:그렇지. 나 이 맛 좋아해. 놀이공원 올 때마다 이게 그나마 기대되는 일이었어. (입 벌린다. 나도 먹여줘.)
백지혜:자주 오셨나보네요. 누구랑? 가족? (얘기만 들어선 그런 집으론 잘 안 보이던데...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입 가까이 대준다.)
오광철:여러 번 왔어. 피기랑. 가족들은 이런 곳 올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한 입 베어 문다. 맛있당.) 형은? 가족들이랑 와본 적 있어?
백지혜:(그럼 아이스크림만 기대할 건... 아니지 않나. 내내 꿨던 꿈도 그렇고, 오광철이 하는 말도 그렇고... 이상한 지점 투성이네.) 어렸을 때 종종 가족들과 왔었습니다. 시험을 잘 봤다거나, 생일이 다가오면 가곤 했었죠. 이제 다 큰 학생 데리고 다니기 징그럽다고 안 와주시지만요. 그래서 오랜만입니다.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오광철:좋은 부모님이네. 형 아빠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빈 구슬 아이스크림 통을 내려놓고 백지혜를 살핀다.) 다 큰 학생이라 하기엔, 음... (작은데?) 내 동생 빌려줄까? 아마 올해 14살? 일텐데. 키는 이 정도고 (자기 코 정도.) 나랑 닮았어.
백지혜:평범하죠 뭐. (시선 받으며 부담스럽게 터키 아이스크림 먹방...) 다 큰 학생이라고 하기엔? (눈매를 좁히고 바라본다.) 빌려주지 말고 다음에 같이 데리고 오시죠. 그땐 정말 이 형아가! 아이스크림 사주겠습니다. (다 먹고 티슈로 입가를 닦는다.)
오광철:다 큰 학생이라 하기엔. (..........) 동안이라고. 형 가족이 오래 봐가지고 징그럽다고 한 거 같아. (티슈와 통을 근처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온 뒤, 손을 잡고 이끈다.) 그래, 다음에 셋이서 오자. 일단 지금은 나에게 집중해 줘. 이번엔 어디로 갈래?
백지혜:(자기도 쬐끄만 주제에... 입을 비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걷는다. 그러던 중 눈에 띈 사격장을 보고 흥미가 가 그쪽으로 방향을 튼다.) 저번에 인형 가게 가고 싶다고 했었죠?
오광철:응. 인형 가게에 가서 형 닮은 거 사고 싶었는데... (아) 맞다. 사격장이 있었구나.
백지혜:아. (창 밖을 바라보다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예.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놀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광철은... 즐거우셨습니까?
오광철:응 좋았어.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 여기 자주 왔는데 사실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거든.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르단 거 하나만으로 엄청 다른 거 같아. (인형 위에 기댄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 작게 중얼거린다.)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백지혜:으음. (시선을 내리고 두 손을 매만진다. 발로 관람차 바닥을 툭툭 건드리다 다시 말을 이어간다.) 두 분의 사이가 어땠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내키지 않았다면... 안 만났어도 됐잖아요. (실은 두 사람이 세상이 점찍은 한 쌍이라는 것도, 게임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하지만, 주인공을 죽인 이후부터의 광철을 보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오광철:안 만날 수 있었으면 나도 안 만났을걸. (창밖을 바라본다. 해가 지는 모습. 오늘이 끝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웃었다.) ... 농담이야.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지금도. 들키고 싶지 않은 본심을 말해놓고 숨기려고 하는 말.)
형. 방학 동안 우리가 보냈던 시간이랑 오늘 있었던 일들. 평생 기억해 줄 수 있어?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어?
백지혜:(아, 또다. 오광철은 자신의 미래에 나를 두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 이후로 만날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 얘기나, 내 여생의 생일을 전부 축하해준 것이나, 미래를 궁금해하면서 정작 그곳에서 함께하자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 눈치채지 못 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중에 직접 말해달라고, 직접 보러 와주면 되지 않냐고 말하지 않았던 건... 애초에 그와 나를 다른 존재로 분류하고 있던건가 싶다. 이 게임 안에서 우리가 이 이상 가까운 사이가 되진 않을 거라고.) 광철이 하는 농담은... 재미 없군요.
물론이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눈 뜨니 침대에서 마주한 일이나, 같이 잠에 든 것, 놀이공원에 온 것도. 덕분에 많이 즐거웠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요...
오광철:재미없어? 그럼 난 개그맨은 하면 안 되겠다. (반응을 보니 무언가 눈치를 챈 모양이지.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바뀌는 건 없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관람차 내부로 옮긴다. 특유의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잘 웃어주는 연애 시뮬레이션의 공략 캐릭터가 아닌오광철그 자체의 표정을.)
즐거웠다니 다행이다. 응. 잊지 않는 거야. 나도, 형도. 영원히...
어느덧 해는 완전히 저물었습니다. 관람차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어요.
금방이라도 별에 닿을 것처럼 올라간 곳에서 보는 놀이공원은 쌀알만 한 조명이 흩뿌려진 듯하네요.
백지혜:(...어쩌다 이런 게 자신에게 넘어와선,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걸까. 평이하고 평온한 자신의 삶에 팔자에도 없던 사랑과, 삶과, 죽음을 논하게 만들다니. 아니, 애초에 그 평온한 삶은 전부 오광철이 만들었지. 멋대로 남의 집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을 심어둔 채 이젠 모든걸 삭제하고 싶다고... 하늘 위 선명히 떠 있는 팝업창에 손을 올린다. 누르길 주저하던 손은 끝내 내려갔지만.) 이 버튼을 누르면 우린 어떻게 됩니까? ...사라지나요?
오광철:(팝업 위에서 손이 내려가자 실망감이 퍼진다. 위험한 난간에서 내려와 곁으로 다가간다.) 응. 사라져.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게임 자체가 전부. 하지만 형이 누르지 않아도 무언가는 사라질 거야. (우리가 함께한 1년의 기억과 내가 설정한 세팅값이. 내가 우연히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시스템을 얻었던 것처럼 변수가 생길 수도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말을 바꿀게. 이 추억을 가지고 죽을래, 아님 배경이 되어 영원히 18살을 반복할래?
백지혜:아. (정말 반복되고 있었구나. 그의 사랑이, 절망이... 그리고 그와 상관없을 나의 인생이. 사실,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이곳이 게임인 걸 알았을 때 부터 조금씩 느껴지던 이질감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저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삶 전체가 누군가의 즐거움일 뿐인 것도, 그게 영원히 반복되는 것도. 얻어낸 사랑이 전부 허물어지는 것도... 절망적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짓은 못 했을 거에요. (그런데 그런걸 오광철은 해내고 말았다. 배경인 자신을 옆으로 끌어올리기까지 하면서.) ...저와 봄방학을 함께 한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아직 제대로 들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상태론... 만족하고 죽을 리 없잖아요.
오광철:(봄방학을 함께한 이유는 처음부터 말했는데. 다시 한번 입 밖으로 고백을 뱉는다.) 좋아해서 그랬어. 모든 권한을 잃고 오류가 수정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주인공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전제가 틀렸다. 세상을 무너트리기 위해 배경인 당신을 끌어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게 타의로 정해진 이 세상에서 형만이 내가 만들어낸 유일한 사람이니까. 내가 직접 설정을 채워 넣어서 움직이게 된 나의 사람이니까. 형만이 수집욕이 아니라 평범하게 날 대해줬으니까. 그런 형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삭제하려는 거야.
다시 거짓된 사랑놀음에 끌려가는 것도 싫지만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형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백지혜:(또 한 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본다. 꿈에서 언뜻 비춰졌던 자신의 모습, 아무런 표정 없이 앉아서, 누워서 허공을 바라볼 뿐인 배경. 당연히 그렇게 되고 싶을 리가 없다. 아니, 돌아가고 싶을 리가 없다. 다만 사라진다는 것 또한 적잖게 두려워서... 기어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농담이 아닌 좋아한다는 말을. 자신을 정말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오롯 나에게만 주었던 감정을 확인하고 나면 용기가 생길까봐.)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사라지는 거군요. 광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전 사랑을 하게 될 리 없고, 삶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곳에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것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닙니다. 될 수 있다면 멀리서라도 광철을 보고 싶어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옆에서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광철이 행복하길 바라니까.
(고개를 올려 팝업창을 바라본다. 여전히 손이떨리지만, 이제는 누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몇번이고 내 행복을 빌며 이것을 눌러왔을 테니까.) 제게 당신이 그랬던 것 처럼. (게임 삭제 버튼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