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무슨 일, 이라뇨. 문자하신 내용 진짭니까? 아니, 무슨 장난이라도 치신 거겠죠. 안 그래도 여행 간 뒤 연락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장난은...
너무하십니다.
오광철:문자 내용 다 진짜야. 연락이 늦은 건 미안한데 이제 만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줘. 말한 것처럼 짐도 다 버려주고, 일도 그만둘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긴 침묵 뒤에 이어지는 목소리가 떨린다.) 미안.
백지혜:잠깐, 잠시만요.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좋은 곳 같아서 그냥 살기로 했다니. 누가 들으면 이제까지 제가 맨바닥에서 재운 줄 알겠습니다! (간결한 사과에 숨을 들이킨다.) ...왜, 왜 같이 있게 오라고 말하지도 않고...
오광철:어, 어어. 그렇지. 형이 맨바닥에서 재운 건 아니긴 한데. 오히려 엄청 잘 대해주기도 했는데. 고마웠는데. (...) 그냥 여기가 좀 더 좋았어. 아, 잠시만. (이후 목소리가 멀어진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이어지다 다시 받는다.) 이제 끊어야 할 거 같아. 잘 있어. 건강하게 지내.
백지혜:... 광철? (소티스랑 오광철을 번갈아 봅니다. 번개소리에 움찔 거려도 시선은 떼지 못 한 채...)
오광철:응. 난데 왜? (시선에 고개를 기울인다.) 비 맞았으니 안에 들어와. 씻고 있으면 밥 준비하라고 할게. (소티스 고갯짓.) 얘한테.
백지혜:(머뭇거리며 입만 우물대다 정신을 차렸는지 작은 한숨을 내쉰다. 첫 번째 가능성은 어느 빌어먹을 방송사의 몰래카메라인 상황. 그럴 경우 적당한 반응만 하며 화는 내지 않는 게 좋다. 두 번째 가능성은... 꿈일 거라는 행복한 도피성 사고. ...우산을 현관에 툭 걸친다.) 잘 어울리네요. 그거 가발?
오광철:가발? 갑자기? 곧 40이긴 한데 탈모로 가발 쓸 정도는 아냐. 이거 봐. (자기 머리 잡아당긴다.) 잘 어울려? 형이랑 살 때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요즘은 자를까 고민이 돼. 무게 때문에 목이 좀 뻐근해서. (머리카락 놓은 뒤 우산을 제대로 정리한다.) 욕실은 1층이랑 2층 다 있으니까 편한 곳에서 씻어.
백지혜:(일단 앉습니다. 몰래 카메라든 꿈이든 얘기 해보면 어느쪽인지 알게 되겠지...) 요리가 수준급이시네요. (안 먹어보고 입 바른 말부터)
소티스:칭찬 고마워요.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자신이 있으니 꼭 맛있게 드셔주셨으면 해요. 겸사겸사 저와 만나기 전 광철 씨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으면 하고요.
오광철:(냠~)
백지혜:예에, 그러죠. (뒤적... 챱 스테이크를 콕 찍어만 두고 먹진 않는다.) 저도 할 얘기가 참 많아서. 먼저 얘기를 꺼내셨으니... 들어나 보겠습니다. (그대로 시선을 광철에게 옮긴다.)
오광철:응? 할 말 있어? 뭘 들어?
백지혜:들으라는데요? 아니 그보다, 저한테 할 말 없으십니까?
오광철:그거 형에게 내가 인천에서 지내던 시절 이야기해달라고 한 거 아냐? 형에게 할 말. 음... (들고 있던 포크 내려놓는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 그리고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살기로 한 거 말 안 한 것도 미안.
백지혜:(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너무 태연하게 맞아주셔서, 차인 건 제 피해망상인가 했지 뭔가요. (작게 중얼 거린 후 눈을 감았다 뜬다. 하루만에 사람 태도가 어떻게 저리 돌변할 수 있는지. ...하루가 지난 거 맞겠지.) 할 말이 사과 뿐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싶군요.
오광철: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제대로 만나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건 계속 신경 쓰이긴 했어. 당시에 일이 좀 급하게 흘러가서. 전화도 그 뒤로 못 쓰게 됐고. (원했던 게 사과가 아닌가? 의문 가득 담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사과 말고 내가 형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백지혜:(포크로 찍은 스테이크를 접시에 분지르며 오체분시한다. 담담한 상대의 표정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게 너무도 많아 어디부터 짚고 가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왜 떠나 오셨습니까? 왜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차분했던 어조가 한 순간에 흐트러지며 제 한 쪽 손목을 잡는다.)
...여기 계신지 얼마나 됐죠?
오광철:아. (바로 물어보는구나. 이 집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표정에 망설임이 깃든다. 눈치 보는 사람 마냥 소티스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대답한다.) 처음엔 진짜로 여행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일이 급하게 흘러갔다고 했잖아 어쩌다 보니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됐어. 그렇게 여기 정착한 지가 벌써 15년 정도 됐나.
백지혜:십, 십 오년? (설마했던 상황이 정답이라니, 몰래 카메라도 꿈도 아닌 정말 15년이 흐른 거였다니. 그것도 혼자서? 분명 전화를 끊고 바로 출발했으니까 고작 하루도 안 지났을텐데. 마을 가던 길에 난 머리를 다쳤던가? 일이 급하게 흘러갔다느니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느니, 뻔한 변명에 더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전, 광철을 못 본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됐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켜본다. 화면에 뜨는 시간이나 날짜, 지역 정보 같은 걸 찾는다.)
(시선은 다시 오광철에게 향한다. 그가 가르키는 반지를 한참 들여다 본다.) 당신이랑?
오광철:일주일? (그만큼 시간이 빨리 흘렀다는 뜻인가? 아님 정말로 형에겐 일주일이었던 건가? 다시 살펴보니 정말 15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일단 전자로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시간이 참 빠르더라. 이 마을에 처음 정착했을 땐 형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툭하면 소티스에게 털어놓고는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지났잖아.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사람이 편해지더라고. 형을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나쁜 짓 한 거 같아.
소티스: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반지를 나누고 같이 지내기는 하지만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 부부라기보단 동반자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백지혜:(15년. 29년 살아온 자신에겐 꽤 아득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제 휴대폰을 넘긴 적은 없으니까 설정에 맞춰 연기 하고 있다는 가능성인 배제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여긴 어디지? 분명 한국 마을인줄 알았는데 앞에 앉은 놈팽이의 이름은 소티스고 뭔 저녁으론 챱 스테이크를 해오고. 간간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라는 말만 내뱉으며 제 얼굴을 문지른다. 여기에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걸까? 그럼 내 몸도 하루 자면 15년 후? ...끔찍한 부가조건이 늘었군...)
그거 참 다행인 일입니다... (혼이 스윽 빠져나간 어투다. 어떤 일에 답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냥 버릇처럼 답한 것일수도 있겠다.)
(이미 산산조각난 챱스테이크 였던 것의 흔적이 들러붙은 포크를 입에 댄다. 소스 뿐이지만 맛있긴 한 거 같다. 그 뒤로 몇 점 더 찍어먹으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간다. 어느정도 배가 찼을 때 다시 차분한 음색으로 물어온다.) 살기 좋은 곳 같아서 여기 있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여전합니까?
오광철:살기 좋은 곳 같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어. 혼자 돌아다닐 때 나중에 형이랑 이런 곳에서 같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지내보니 한적하고 평화로워서 점점 마음에 들어지기도 했고. (먹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포크를 집는다.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냐는 질문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묻는 게 좀 늦었는데. (포크를 집지 않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 아까 올 때 보니까 산발이더라. 표정도 안 좋았고.) 나 없는 사이에 잘 못 지냈어? 이젠 진짜 나 없이 지내야 하는데. 우리 형 어떡하지.
백지혜:(아랫 입술을 꾹 물었다 놓는다.) 길도 엉망이고, 비가 오면 툭 하고 침몰 될 거 같은 다리에, 산의 나뭇가지들은 공격적이고. (남이 사는 마을에 대한 악담을 줄줄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전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자신이 없는 곳이 살만 했다는 것과 익숙해져선 마음에 들어 하기까지, 다른 사람이랑 태평히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려 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히 아니 꼬왔다.)
(머릴 정리해 주는 손길에도 비틀린 심신은 영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언짢아진 것도 같다.) 제가 광철 없이 지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돌아가지 못 하는 이유. 설명해 주십쇼
오광철:그건 관광지로 제대로 개발되면 해결될 문제기도 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시간 보내기에도 좋고. 지내보면 정말 괜찮은데. (크게 반박하진 않는다. 처음 비가 오는 날엔 본인도 저 감상을 그대로 읊었으니까. 정리를 마친 뒤에도 계속해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중,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움직이던 손길이 멈춘다.) 내가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소티스:(두 사람의 말을 끊고 들어온다.) 오래 이동하느라 예민해진 모양인데 이만 쉴까요? 2층에 손님용 방을 준비해 뒀어요. 오래 안 쓴 곳이지만 아침에 청소했으니 그럭저럭 며칠 머물 정도는 될 겁니다.
백지혜:15년이나 관광지로 개발중인 마을이 잘도 짠 하고 변하겠습니다. (손길에 별 신경 안 쓰고 있다가 그 움직임이 멈춰서야 아쉬움을 느낀다. 오랜만에, 15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 만에 본 건데. 사정이 어찌돼쓴 좀 더 붙어있으면 좋지 않을까. 긴 세월에 나에 대한 그리움도 애정도 흐리고 옅어져 사라진걸까. 납득이라도 시켜준다면 좋으련만. 기다리던 말이 끊어지자 소티스를 바라본다. 그야말로 이 상황은 아주,) 억울한데...
...죄송합니다. 초면에 무례를 많이도 저질렀군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를 기다린다.) 친절하신 권유에 사양은 않겠습니다. 그리고 식사 감사했습니다, 소티스 씨. 맛있던데요. (하루 머물러 15년 늙더라도 이유는 알고 가야겠어...)
백지혜:소티스 씨한테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아쉽군요. (어제 온 주제에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습니다.) 처리는 아침 식사 하셨습니까?
오광철: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나 자는 사이에 나 빼고 둘이 놀았어? (맞은편에 앉아 포크로 스크램블 에그를 깨작인다.) 아직. 그런데 입맛 없어. (아침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백지혜:제가 원래 사람을 빠르게 사귀고 그럽니다. (아님...) 그래도 좀 드셔야죠. ...그 나이면 하루 식사 거르는 게 타격이 큰데. (갑자기 밀려오는 이질감과 슬픔... 입가를 막고 훌쩍인다.) 왜 저 빼고 늙으셔서!
어서, 드세요. (장난 멈추고 그릇을 툭 건드린다.)
오광철:맞다, 그랬지. 형은 언제나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으니 하루 만에 소티스랑 친해진 것도 이해가 가. (계속해 포크로 계란을 섞다가 얇게 썬 베이컨 위에 넣고 만다.) 몇 년을 이렇게 지냈는데 이제 와서 타격받아봤자, 뭐. (내가 늙고 싶어서 늙었나! 만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를 한 입에 넣은 뒤 포크를 내려놓는다.) 형 많이 먹어. 나 딱히 밥 생각 없어.
백지혜:뭐... 정황상 광철의 정착을 도와주신 분 같으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다 싶긴 하더군요. (못 돌아가는 사정이 무엇인지, 이 마을이 대체 어떤 곳인지는 알아내지 못 했지만 별개로 나쁜 사람은 아닌 듯 했으니까. 그리고 만약 광철을 못 데려 간다면... 생각이 깊어지자 절로 표정이 어두워진다. 남이 차린 밥상 앞에서 죽상도 예의는 아니지.) 출근이라면 병원? 마을에 하나뿐인 의원이시라던데요. 아, 광철은 무슨 일을 합니까? 15년의 공백이 크긴 하군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잠까지 설쳤습니다. (자연스럽게 빵을 들어 광철의 입에 툭.)
오광철:내가 여기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 맞아. 둘 다 중요한 사람이니 싸우면 내가 좀 곤란해서. (15년 전 그랬던 것처럼 입가에 가까워진 토스트를 베어 문다. 느릿하게 턱을 움직여 삼킨 뒤 토스트가 들린 손을 밀어내며 이번엔 지혜의 입가에 닿도록 했다.) 응. 집 근처에 진료소가 있는데 오전 중에는 거기 있을 거야. 난 하는 일 없는 그냥 집 지키기 담당. 매일 뒹굴거리니 아침 거른다고 에너지가 부족하진 않아. (안 쓴 손으로 익숙한 브이를 만든다.) 그거 말고 더 궁금한 건 없어? 다 먹으면 마을 안내해 줄까?
백지혜:싸울 일이 뭐 있겠습니까. 광철을 협박하고 납치해서 여기 가둬둔 사람도 아닐텐데. (중요한 사람... 눈가에 그늘이 지나 싶던 차 토스트가 입에 닿자 얌전히 남은걸 먹어 치운다.) 의외네요. 처리는 지루하고 심심한 일을 못 버티는 성격이라 필시 다른 일을 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5년이면 사람 체질도 변하나? (포크로 베이컨을 툭툭 자른다.) 궁금한 점 많죠. 어제부터 계속 물어봤던 '여기서 못 돌아가는 이유' '저는 광철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전 분명 아무런 연락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티스 씨와 광철은 얘기를 나눈 듯 해 보이더군요. 마치 제가 올 걸 알고 있던 사람들처럼.
오광철:만약 소티스가 날 납치해서 가둬둔 거면 어떡할 거야? (툭. 농담처럼 말을 던진 뒤 토스트를 밀었던 손으로 턱을 괴고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지루하고 심심한 거 여전히 싫어해. (체질이 바뀌었다기보단 지루한 일에 익숙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하는 대신 주방에서 가끔 빵을 굽거나, 2층의 작은 방 안에 가지고 놀 만한 것들을 챙겨주긴 하는데 좀 더 자극적인 놀이가 있었으면 좋겠단 불만은 아직 있어.
(물음에는 미묘한 표정 짓다가.) 몰라. (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회피했다.) 형이 올 거라는 건 정말 몰랐어. 손님이 온다고는 들었지만 난 그게 다야.
백지혜:그렇다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구출해 데려가야겠죠.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닦으며 생긋 웃음 짓는다.) 어제부터 생각했지만 광철은 이 마을과 안 어울려요. 혼자서 빵을 굽는 것 보다 도전적인 레시피를 만들어 내는 게 더 재밌을 테고, 혼자 소꿉놀이를 할 바에 차라리 또래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뭐, 후자는 저도 많이 걱정하게 되겠지만...
몰라? (간결한 답에 눈매가 가늘어진다. 어제는 말해줄 것 처럼 굴더니. 밤 사이 뭔가 얘기가 오갔나? 이 질문은 소티스에게 묻거나 직접 알아내는 편이 빠르겠어. 무의식 중 제 눈가를 더듬는다.) 좋습니다. 다른 질문을 하죠.
시력, 많이 안 좋아졌나요?
오광철:농담이야. 형이 날 구출할 필요는 없어. (갑자기 헤어진 데다가 어제 저녁엔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도 구출하겠다 당당히 말해주는 일은 기뻐서. 따라 웃음 지었다.) 마을 사람들과 싸우는 건 평판이 걱정되니까 대신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는 걸 대비하려고. 괴물과 주먹다짐하는 쪽이 더 멋있잖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 응. 몰라. 15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너무 오래돼서 다 잊어버렸어. 시력은 (안경을 벗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많이까진 아닌데, 여기 앉아있으면 창문 옆에 있는 벽걸이 달력의 숫자가 보이지 않아. 여기 정착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찾아볼 게 있어서 내내 도서관과 서재만 다니던 탓에.
백지혜:그렇군요. (입가엔 희미한 웃음만 남겨둔 채 포크로 베이컨을 콕 집어 입에 넣는다. 몇십번 씹어 삼키고 다시 하나를 찍어 누른다.)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는 건 너무 과한 자극이 아닐까 싶은데요? 확실히 수상하고... 이상한 마을이긴 하지만. (따라 창가로 시선을 옮긴다. 어제 밤 칠흑같던 마을은 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보통 집에 온 손님이 잘 있는지... 밤 중에 확인하진 않을텐데. 문 여는 소리가 너무 컸나.)
으음, 뭘 그렇게 찾으러 돌아다녔나 궁금해 지는군요. 그렇게나 읽고 본 게 많다면 돌아갈 곳 따위 잊어버려도 무리는 아니죠.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을 구경 시켜주겠다는 말, 아직 유효합니까?
오광철:하지만 너무 지루하게 살았더니 이 정도 자극이 아니면 재미있지 않을 거 같아. 날 위해 괴물이 되어줘. (그럼 내가 형과 싸워야 하는 건가? 그건 좀 싫은데.) 내가 찾고 조사하던 건 중요한 거 아니니까 잊어도 돼. 별거 아냐. 성공도 못 했어.
백지혜:(호수 표면 가까이 붙어 앉아 물결을 빤히) 이 마을은 둘러쌓인 숲과 호수를 내세워 관광지로 활용중이었는데, 별다른 관리는 하지 않고 있나 보네요. 정말 관광지로 개발 중인 게... 맞을지. (빛나는 안쪽을 유심히 보다 일어선다.) 글렀네요. 평생 지루하실 겁니다. (난데없이 악담)
오광철:어제 비가 와서 그런 거 아냐? 평소에도 물 소은 깨끗하던데. (괜히 수면에 돌 던지다 난데없이 들려온 악담에 퉁명스러워진다.) 어떡하지. 평생 지루하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지금 죽었어. (바닥에 천천히 드러눕는다. 죽은 척.)
백지혜:하긴, 엄청 내리긴 했죠. (여전히 호수 안 쪽을 바라보다 드러누워버린 오광철을 돌아본다.) 죽었으니 들쳐메고 집이나 가야겠다. 원래 무덤은 태어난 곳에 세워야 하거든요. 인천 기억 하시죠? 좋은 자리 알아놨었습니다. (다리 붙잡음)
오광철:너무 많이 내려서 걱정했었어. 다리가 끊기면 그대로 고립되는 거니까. (다리 잡히자 눈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이대로 나 데리고 인천까지 돌아갈 수 있어? 끌고 갈 수 있겠어?
백지혜: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한평생 마을 밖에 안 나가실 것 처럼 굴더니. 고립되어 봤자 아닙니까? (잡은 다리를 살짝 들고 가늠하듯 훑어본다.) 힘들긴 하겠지만 우리처리를 위해 그정도도 못 할까요. 15년간 (일주일임) 저도 놀기만 한 건 아니라서. (뭐 안 함)
오광철:나는 안 나가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이 있잖아. 형처럼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물자는 계속 들어와야 하니까. 전쟁에서 보급로를 끊는 거랑 비슷한 거야. (잡힌 쪽 발목 까딱거리다가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서 그런가,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하루가 유독 짧네.) 해도 지는데 슬슬 돌아갈까? 인천 말고 가까운 마을 집으로 가는 건 어때?
백지혜:다른 사람들은 오고 가는데 광철만 돌아오지 못했다라. 문자 내용만 보면 돌아올 마음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긴 하겠네요. (잡은 발을 놓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손만 내민다.) 못 본 새 남들에게 관심이 많아지시고, 똑똑해 지시고, 제 마음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오광철:돌아가지 못했던 것과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거 뭐가 맞는 거 같아?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다리가 자유로워지면 그 자세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다.) 난 원래 이랬어. 알잖아. (잡았던 손을 놓지 않은 채 집 방향으로 향한다.)
소티스:광철 씨를 걱정해 주는 마음은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앞으론 이런 일 없게 할 테니까요. 일단 오늘은 절 믿고 손님은 돌아가서 푹 쉬어주세요. 전 밤새 환자 곁을 지키다 들어갈게요.
백지혜:(가만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앞에서 한 걸음 떨어져선 오광철을 바라본다.) 아까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거 같은데, 아닌가요?
오광철:할 말... 이 있긴 한데 형이 있는 곳에서 하긴 좀 그래. 일단 우린 집에 돌아가자. 소티스에게 할 말은 내가 나중에 따로 전할게.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걸어간다.)
백지혜:(즉 비밀 얘기로군. 소티스에게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그 뒤를 따라간다.)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하는 게 좋습니다. 언제 하루 아침 안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작은 조소) 경험담이에요.
오광철:소티스는 내가 죽기 전까진 계속 이 마을에 있을 테니 내가 당장 지금 죽는 게 아니라면 말할 기회는 많아. (경험담이란 단어에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인다.) 같이 살던 시절엔 형에게 숨기는 게 없었는데. 있어도 크지 않은 일이었고.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금은 형에게 말하는 것마다 다 숨겨야 하는 거 같아서 답답해.
백지혜:참으로 로맨틱 하십니다. (시선을 내려 그의 왼손을 살펴본다. 자신과 다른 반지를 끼고 또다시 영원을 맹세하는 말을 읊었을까. 본 적도 없는 결혼식의 장면을 상상하며 미간을 좁힌다. 번복된 영원에 의미는 없어. 한 번 깨어진 거라면 두 번째도 똑같아. 그들의 관계를 폄하해도 상황이나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데, 왜 그만둘 수 없는지...)
...제 탓으로 돌리진 마세요, 아니니까.
오광철:로맨틱한 게 아니라... 됐어. 말해도 형은 모르잖아. (시선을 느끼곤 손을 몸으로 가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 이를 말해봤자 전부 기만일 뿐이란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이러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형 탓으로 하지 않을 거야. 이건 내 문제고 동시에 나라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까.
(말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다. 오늘따라 현관문이 무겁다.) 일찍 자자. 피곤해.
백지혜:(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알려준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타인의 무지를 확신하는 태도라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가라 앉는다. 어차피 그에게서 직접 듣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던가. 천천히 호흡하며 속을 진정시킨다. 덕분에 간신히 악의 없는 인사 한마디나 뱉을 수 있었다.) ...예, 안녕히 주무세요. 광철.
백지혜:(침대에 누워 아침에 본 쪽지와 서랍에서 챙긴 종이를 꺼내 살핀다. 당연하게도 둘 다 광철의 필체. 변이 되는 과정엔 이틀이 걸리고, 광철이 문자를 보낸 건 여행일로부터 3일.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한데, 15년이 지났다는 것도 모자라 괴물이 된 것 까지 믿으라고?)
백지혜:갑작스러운 축객령이군요. 물론 마음대로 찾아온 건 제가 맞습니다만, (상 앞의 식사를 가만 내려다 보기만 한다.) 매정하시긴. 그래도 조금은 보고 싶어 할 줄 알고 온 건데.
오광철:그럼 떠나란 말을 갑작스럽게 하지 누가 예고하고 해. (밥 먹을 기분이 아닌지 이쪽의 앞엔 식기조차 놓이지 않은 상태다. 천천히 식어가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 말한다.) 당연히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좀 더 준비가 된 뒤에 다시 봐.
백지혜:뭐... 알겠습니다. (식탁에서 눈을 떼 앞 상대를 바라본다. 눈썹을 죽 내리며 작게 웃음 지었다.) 오늘 한 끼도 안 드신 것 아닙니까? 집주인 분께서 조금이라도 드셔야 불청객이 마음 놓고 떠나지 않겠어요? (제 앞의 식기를 손으로 밀어 식탁 중앙에 둔다.) 언제는 다신 못 볼 거라더니.
오광철:오늘 아무것도 안 먹긴 했지만 이제 와 하루 안 먹는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불청객은 쫓아내는 집주인 걱정하지 말고 다 먹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나 해. (식기를 다시 밀어낸다.) ... 내가 그런 말을 했나? 몰라. 다신 못 볼 거 같아도 살아있으면 지금처럼 언젠가 또 만나겠지. (숨을 삼키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살아만 있으면.
백지혜:손님을 대접하는 방식도 엉망이고, 뭐 하나 알려준 것 없는 주제에 농락하듯 뒤엎는 화법이라니. (식기가 밀어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다.) 전 번복된 말들은 믿지 않습니다. 지금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식탁에 손을 짚고 몸을 굽힌다. 젓가락으로 아무 반찬이나 집어 그 앞에 들이민다.) 그러니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잖아요.
제가 이곳에 오는 게 싫다면, 저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오광철:그건... (그야 여긴 손님이 올 수가 없는 곳이니까.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일반인들이 알아선 안 되는 일이니까. 변명하려는 말들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맴돈다.) 나도 내가 하는 말들이 설득력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어쩔 수 없는걸 어떡해.
(내밀어진 반찬을 받아먹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됐어. 형 이러는 거 싫어. 미워. 나 여기서 잘 살고 있을 거니까 이제 다시는 오지 마. (본인이 말한 주제에 상처받은 표정으로 잠시 노려보다가...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간다.)
백지혜:(반찬을 받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본다. 잠시 침묵하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 젓가락을 그대로 써 식사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소티스를 바라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제부터 제 탓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이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맘에 안 들더라도 뭐.
저는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잖습니까.
소티스:(둘의 대화를 듣다 부르는 소리에 반응한다.) 그럴까요? 맘에 안 들긴요. 마침 저도 지혜 씨가 참 궁금했는데 대화할 시간이 없어 아쉬웠거든요.
광철 씨가 말하기 싫어하는 건 저도 대답해 드리기 그렇지만, 알려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뭐든 편히 물어봐요.
백지혜:(잠시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젓가락을 놓는다. 궁금하다니 알려주도록 하지... 내가 이 집에서 뭘 훔치고 댁 의료실에서 뭘 읽었는지에 대해 말이야.) 처음 왔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이 집 정말 멋진데요. 목조 건축이 요즘 시대에 흔하지 않거든요. 굉장히 친환경적이라 할지... 소티스 의 취향입니까? 아니면, 광철과 함께 살면서부터 천천히 바꾼 걸까요. 인생의 동반자라 하셨으니 뭐든 서로에게 맞춰 가는 게 좋잖아요. 싫어하는 건 빼고 위험한 건 없애고.
소티스:그렇죠? 취향이라 고른 건 아니고 (오히려 광철 씨는 도시가 좋다고 처음에 뭐라 했었죠...) 운 좋게 마을에 딱 하나 남아있던 빈 집이 이곳이었어요. 덕분에 15년 동안 눈이 참 즐거웠는데. 살다 보니 광철 씨도 마음에 들어 했던 거 같고... (식탁을 손으로 가볍게 쓴다.) 가구나 인테리어는 집에 맞춰서 천천히 꾸몄어요. 목조 건물에 쇠로 된 물건은 안 어울리잖아요.
백지혜:그렇군요. 그렇게나 정성을 들인 집이니, 광철이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참 다행이지 뭡니까. 그와 함께 해주신 분이 소티스 씨라서. (컵을 들어 물 한 모금을 입에 담는다. 꿀꺽 삼키곤 컵을 내려 놓았다. 짐짓 어두운 표정을 해보이며 제 손등에 손을 얹는다.) ...처리는 딱히 절 기다리지 않았던 거겠죠. 그간 보고 싶어 하지도, 절 다시 만나 반갑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제가 이곳에 올 필요 따윈 없었을 거예요. (흘긋, 시선을 올린다.)
소티스: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처음 이곳에 살기 시작했을 땐 며칠을 형이 보고 싶다며 밥도 제대로 안 먹었고, 급기야 집에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고 연구까지 시작해서... 이틀 전엔 잠들기 직전까지 지혜 씨 이야기만 잔뜩 했어요. 아마 전 평생 당신을 이기지 못하겠죠. (끼고 있는 반지 만지막거린다.) 그냥 우리에겐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랬던 거니 오늘 광철 씨가 예민하게 대했어도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백지혜:글쎄요. 관계에 있어 중요한 건 함께한 시간이 아니라 그곳에서 비롯되는 감정, 그때의 상황이나 둘만이 갖는 고유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원히 알 리 없을 두 분의 사이를 감히 이겼다 자신 할 순 없지요. (따라 반지에 시선이 흐른다. 반지는 보통 금속이지. 광철의 손에도 같은 게 끼워져 있던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 했어.) 아뇨 아뇨. 말 그대로입니다. 분명 이 마을에 제가 와야 했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잠깐 웃으며 소티스를 바라본다.) 투정은 그만두겠습니다. 소티스 씨, 이 마을의 유일한 의원이시라고요. 어쩌다 연고도 없을 마을에서 일을 하시게 된 겁니까?
소티스: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두 분이 공유한 상황과 고유성을 알지 못하는데. 그럼 오늘은 비겼다고 해도 괜찮을까요? (반지로 시선이 오는 걸 느끼고 어색하게 웃는다. 상대는 껴주지도 않는 반지건만 손님이 온단 소식에 과시하고자 일부러 끼고 다녔단 것을 들킨 거 같아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저 역시 광철 씨와 비슷해요. 업무차 이 마을에 잠시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광철 씨를 마주치고 나도 모르게.
백지혜:...가려봤자 무의미한 승패입니다. (눈을 감고 작은 숨을 내쉰다. 질문의 본질을 파악하고 고의로 듣고 싶은 답은 해주지 않는 거겠지. 대화를 감정적으로 이끌며 도발하고 있다는 감상마저 드는데... 둘 사이에 애정적 유착이 있음은 알겠다. 적어도 소티스는 그럴 것이다. 노골적인 일기를 다 읽어버렸는데 어찌 모른 척 하겠나? 마치 감정 하나 모르는 로봇이 사랑을 찾아간단 내용의 교훈 깊은 소설이라도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로맨틱한 비극이군요. 적어도 저한테는... (시선을 내리깐다. 광철은 마을에 들렀다가 아주 비극적이게도, 우연히 정체 모를 것에 감염됐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를 하던 소티스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외부에 감염을 퍼트릴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을에 고립. 그 관계가 이어져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르렀고, 자신이 마을에 온 것을 이유로 생을 끝내려고 한다...? 그럴 필요는 없어. 다른 이유겠지. 김 씨가 마을에서 산짐승의 습격을 받은 날, 무슨 계기가 생긴 거야. 소티스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지. 의도한 일이었을까? 이곳의 시간과 정신은 왜곡되어 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하나? 바깥일이라는 건 뭐지? 아니면, 아니면...) 해가 뜨는 대로 이 마을을 떠날 겁니다.
...떠나기 전, 호수에 들러볼까 해요. (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소티스:(대화를 얼추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 그래도 힘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너무 괴롭히진 마세요. 마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 만큼 좋은 꿈 꾸시길 바랄게요.
백지혜:(사랑하는 사람은 구울 같은 게 되고, 발을 들이면 15년이 흐르는 데다 호수 안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마을이라니. 비이상적인 일 뿐인 마을에서 이상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건 너무하잖아. '끝내는 법...' 소티스는 이 장치로 광철의 변이를 막았고, 광철은 다시 동일한 수단을 써 변이를 가속하려고 한다... 아니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있다거나... )
오광철:소티스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라고 자리 비워줬어. 마지막인데 싸운 채로 끝내는 건 아쉽지 않겠냐고.
... 할 말 있어?
백지혜:이 집에 처음 왔을 때랑 똑같군요. 제 꼴이 우스워졌습니다.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애매한 웃음을 짓는다. 그대로 자리에 서서 입을 뗐지만 길게 이어지진 않는다.) 실은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지막이라니. 너무도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나는 고작 광철을 일주일 못 본 것뿐인데 혼자 아득한 세월을 보내버리고,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려 들어 당신의 부재는 오롯이 저의 것으로만 남아버렸습니다.
저 역시 듣는 것이 두려워 물어보지 않았으니, 남을 탓할 입장이 못 되는 군요.
...이제는 제 존재가 당신의 삶에서 의미가 없나요?
오광철:뭘 하다 다 젖어서 온 거야? 그대로 가면 감기 걸려. (일어나 욕실에서 수건을 챙겨온다. 머리 위에 수건을 덮고 문지르니 민물 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이 호수에 다녀왔구나. 그렇다는 건 내게 일어난 일을 대강 눈치챘을 거고, 내가 이 마을에서 살아가길 희망했단 것이겠구나. 머리를 닦던 수건을 내려놓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꾹 누른다.) 원래 사고는 다 갑작스러우니까.
아냐. 반대야. 여전히 형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여전히 머리를 기댄 채 숨을 한 번 고른다.) 괴물이 될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갑자기 사라진 나쁜 놈이 되더라도 끝까지 형의 기억 속엔 인간으로 남아있고 싶었어. 진상을 알려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상처 내며 밀어냈던 건데... 많이 화났어?
백지혜:(다 닦지 못한 물기가 머리카락에서 부터 떨어져 시야를 방해했다. 마지막인 만큼 그를 많이 볼 수 있길 바랐는데. 희뿌연 시야는 물기가 다 말라감에도 나아지질 않았다. 이럴 거면 감아버리는 게 훨씬 낫겠어. 눈을 감아내고 나서야 눈물이 뚝 뚝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어째서 광철에게, 대체 왜 나에게! 저는, 억울합니다. (몇 번을 더 억울을 호소 하며 품에 기댄 그를 끌어안는다. 연락을 받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면, 마을을 찾아갔을 때 올바른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면, 나는 너와 여기서 삶을 지속하고 싶었는데.) 불행을 받아들일 기회도 얻을 수 없었어요...
(그의 머리 위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익숙한 샴푸 향이 폐부에 깊게 스며들어 더욱 애석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광철은 여전히 ...여전히 어찌할 방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손 쓸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밉다고 말할 수 없는... (고개를 들고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제가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화를 내면, 다시 사과하시려고요? 이제 그만 듣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충분했으니까요. 애초에 사과할 일도 아니었는데...
오광철:(억울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이왕이면 자고 일어났을 때 잘 잤냐는 인사를 형이 말해줬으면 했어. 재미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 형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살고 싶었어.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늙어가고 싶었어. 그걸 보고 놀리는 평화로운 삶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어. 그 미래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일어난 사고 하나로 전부 잃어버렸는데 어찌 억울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어. 그렇게 한참, 안긴 채 눈물만 뚝뚝 떨어트린다.)
(사과를 그만 듣고 싶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얼굴을 덮은 손을 잡아 내리고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춘다.) 날 찾으러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24살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도, 계속 사랑해 줬던 것도, 밀어내도 싫어하지 않은 것도 전부 다 고마워. (내렸던 손에 깍지 낀다.) 나 소티스에게 받은 반지 한 번도 안 꼈어. 이미 이 자리는 주인이 있으니까. 2층 내 방 옷장 안에 있으니까 돌아갈 때 가지고 가줘. 그리고 날 기억해 줘.
나는 인간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 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형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백지혜:(눈꺼풀 위 부드러운 입맞춤이 떨어지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뜬다. 그렇게 또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춘다.) ...감사했습니다. 제 삶을 뒤엎어 주신 것, 옆에 있어 주신 것,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깍지 껴 잡은 손을 들어 그 손가락 위로도 입을 맞춘다.) 광철에게 남은 생이 평안하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다만, 부디... 영원히 이 자리만큼 비워주세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준다면 나 또한 영원히... 조용히 홀로 맹세하며 작게 웃음 지었다.)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