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철:내가 항상 사고만 치는 것처럼 말하네. 선배 욕하는 것만 아니면 얌전히 있겠다고 했잖아.
백지혜:안부인사 겸 물어본거죠. 오늘은 제 욕 하는 사람이 없었나 봅니다. 기쁜데요! (하하~ 하고 작위적인 웃음소리를 낸다.) 그럼 요즘 안 바쁘다는 걸로 알고.
(몸을 일으켜 책상 가까이에 붙는다.) 약 좀 옮기고 인생 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붙잡아 보시겠습니까?
오광철:응. 오늘은 선배 평판 꽤 좋던데? 어쩌면 선배 곁에 미친 개 하나 붙었다는 게 이제야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고. (반대쪽 소파에 눕듯이 기댄다. 흥미 없는 듯 딴 곳을 바라본다.) 갑자기 웬 약? 필요해? 옮기는 김에 좀 슬쩍해줘?
백지혜:음, 화륜강에서 소문이 그렇게 늦게 돌 리 없는데... 역시 제 평판이 좋아진 거겠죠. 요즘 착하게 살았거든요. (관심이 있든 말든 품 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이 화륜강 안에 마약이 돌아다니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만은…
이 시점에서? 뜬금없는 얘기입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야 할 만큼 낮은 상에다, 그는 구깃거리는 종이를 펼쳐 놓습니다.
종이에는 6명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백지혜:저 약 안 하는데? 앞으로도 할 일 없으니 슬쩍 하지 말고 정직하게 옮깁시다.
내일 오후 7시, 이 여섯명 중 하나가 아편을 들고 화륜강에 들어올 겁니다. (책상에 놓인 종이를 툭툭 가르킨다.)
저희는 그 아편을 가로채지만 하면 되는데… 이 여섯명 중 누가 가지고 있을진 모른다는 거죠. 제가 하나하나 다 뒤지기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와, 광철이 (종이의 중간에 손날을 세워 반으로 나누듯 올려둔다.) 단 둘이서. 그럼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오광철:혹시나 해서. 여기 사람들 갑자기 약쟁이 되는 게 보기 어려운 일도 아니고. (종이 속 인물들 바라본다. 아하.) 옮기는 게 배달이 아니라 절도였구나? 평범한 아편으로 인생이 핀다면 이미 여기 사는 사람 절반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테니 아편뿐만이 아니라 뭐 수상한 것도 섞여있나 보지?
해줄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하자는데. 그리고 성공하면 문 고장 난 집 말고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자.
백지혜:그거야 그렇지만... 말리는 게 아니라 구해다 준다니, 하나뿐인 선배를 뒷골목 비둘기로 만들면 어떡합니까? 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자리 물어다 주고, 데리고 살아준다고. (투덜대듯 말하다 하겠다는 답변에 만족스레 웃는다. 조금은 안도의 한숨이 섞인 것도 같다.) 배달부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자고요.
좋습니다. 방도 두 개 있는 집으로. (브이~) 약속해 드리죠.
아편을 들고 있는 자를 찾으면 뺏은 후 바로 국수공장 뒤로 가면 됩니다. 전달받을 패가 나와있겠다는군요.
오광철:아. 그런 문제가 있었네. 하나뿐인 선배니 이왕이면 삶을 즐겁게 살아줬으면 했던 건데 하마터면 둘 다 길바닥에서 뜯길 뻔했네. 하하, 웃겨.
그럼 선배 약 구해주기는 일 전부 끝나고 이사까지 간 뒤에 내 힘만으로도 선배를 무사히 케어하고 살 수 있게 된 이후로 미루자. 이번 일에선 착한 아이가 될게. 남의 물건에 관심 가지는 배달부 따위 안 될게.
(다시 소파에 푹 기댄다. 방이 생기면 무엇부터 채워 넣을까 고민하며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른다.) 그럼 좀 잘 테니까 일 시작할 때 깨워줘~
백지혜:약 같은 거 안 해도 아직까진 좀 즐겁고 살만합니다. 누구 덕분인지... (말하는 내용마다 기가 차고 어이없어 미간이 천천히 좁혀온다. 아무튼 이번 일에선 말 잘 들어준다니 됐지. 긍정적 사고, 긍정적 사고... 3번 정도 그 단어를 되뇌었다.) 평생 환락의 즐거움은 즐기지 못 하게 생겼네. (작게 중얼거리며 웃는다.)
오광철은50 분 동안 잤습니다.
많이 잤네
오광철:(졸령)
쿨~ 하고 있다 보면 백지혜가 어깨를 흔들어 깨웁니다.
백지혜:광철, 일어나 보세요!
오광철:... 응? 벌써 시작됐어?
백지혜:아뇨.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습니다.
배고프니까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멀뚱~)
오광철:(한 시간도 안 지났단 말에 표정 꿍해진다.) 뭐 먹을 건데? 메뉴 듣고 생각할래.
백지혜:(눈이 빙글 돌아간다.) 탄탄면? 딤섬?
오광철:차가운 딤섬도 있어?
백지혜:있죠. 제가 후후 불어드리는 딤섬.
오광철:그럼 갈게. 선배가 깨웠으니 책임지고 불어.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 켠다.)
백지혜:나 참, 원래 밥 같이 먹어주는 건 집 지키는 사람의 의무입니다. (겉옷이나 간단한 소지품을 챙기고 먼저 문 앞에 선다. 5번 정도 시도해 간신히 문을 열었다.) 으음, 이사 가긴 해야겠네.
오광철:언제는 그런 의무 안 챙겨도 된다면서. (그랬던 적 없다. 자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문 여는 걸 지켜보다 나오게 되면 대충 발로 밀어 닫는다.) 다음엔 발코니가 있거나 연기가 잘 빠지는 곳으로 가자. 매번 밖에서 피우고 들어오는 거 귀찮아.
백지혜:그랬던가? 건강하게만 자라달란 말은 했던 적 있는 것도 같습니다. (닫힌 문을 힐금 보기만 하고 걸음 옮긴다.) 이참에 끊어보는 게 어떨까요. 몸에 좋지도 않은데
오광철:나도 모르는 내 부모가 낳아준 성격인가 보지. 분명 쓰레기 같은 사람들일걸. 하하. (메뉴판 뒤적이다가 카오야 위에 손가락 올린다.) 이건 둘이서 먹기엔 많나?
백지혜:아니죠. 이 화륜강에서 먹이고 씻기고 동화책 읽어준 건 전데 이제와 쓰레기 같은 부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진짜 어디서 나왔지~ (주인장을 불러 카오야도 추가 주문한다. 얼음컵 한 잔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고.) 먹다 남겨요. 뭣하면 포장하죠.
오광철:선배의 노력보다 유전의 힘이 강했던 모양이지. 나한테 질릴 즘에 좀 더 어린애부터 잡아와 키워보는 건 어때? 이왕이면 착한 동생으로 만들어줘. (선글라스 벗어 내려놓는다. 뜨거운 거 먹을 때 김 서리는 거 싫어.) 포장해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까?
백지혜:슬프군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도 쭈욱- (벗어둔 선글라스를 집어 아까 챙겼던 케이스에 넣는다. 테이블 구석에 올려둔 후 젓가락을 뽑아 내밀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은 좀... 사실, 광철과 살기 전에 한 번 전적이 있었거든요.
(탁, 하고 나무젓가락을 나눈다.) 아침에 기름진 거 싫다고 안 먹을 거면서!
한창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들:그거 내 거잖아!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지 뭐!
그제서야 옆 식탁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머니 한 명이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피곤한 낯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쪽 식탁은 흩어진 음식물들로 엉망입니다.
지칠 만도 하지요.
백지혜:(옆 태이블을 가만히 보다가 웃는다.) 귀엽네요. 딱 저 나이때 애들 같고.
오광철:노력해 봐. 선배가 날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해. (받은 나무젓가락 나눈다. 짝짝이가 됐다. 말한 것처럼 아침이면 높은 확률로 안 먹겠지만... 젓가락만 입에 문 채 끝을 가볍게 씹었다.)
응? 전적? (따라 옆 테이블로 시선 옮겼다가 하품하며 돌아온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아.) 모르는 애들이 귀여운 건 됐고, 내가 선배 첫 번째 애가 아니야? 어쩌다 헤어졌어?
백지혜:예전에 주워서 키우다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지금은 영원히 못 만나게 됐어요. 이 바닥 사정이 다 그렇잖습니까. (어깨를 으쓱인다. 손을 뻗어 짝짝이인 젓가락을 가져오고 비교적 반듯한 제 젓가락을 쥐여줬다.) 종종 그리워지곤 합니다. 저 나이 때 애들을 보면...
광철은 어떤가요? 애 하나 주워서 키워보는 게? 어린애들 싫어하십니까?
오광철:음~ (반듯한 젓가락 받은 뒤 몇 번 손을 움직이다 웃는다. 선배의 전 아이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이란 게 마음에 들어. 아무튼 지금은 내가 유일하다는 거지?)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그리워할 시간에 지금 있는 애한테 좀 더 잘 해줘. 난 죽거나 헤어지지 않으니까.
내가 애를? 왜?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막상 키우게 되면 잘 대해주기야 하겠다만 당장 아이를 키우는 자신을 상상하라고 하면 되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난 평생 누군가에게 키움 당하며 살 거야.
백지혜:(들려온 말에 미묘한 표정으로 입만 벙긋대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죽거나 헤어지지도 않을 거라면 독립 역시 못 하게 되는 거잖아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 장면을 상상이라도 하는 건지 실실 웃으며 젓가락의 들쑥한 부분을 손끝으로 문지른다.) 안 보내 줄지도 모릅니다.
왜냐니, 나름 보람차기도 하고... 작은 생명에게 온 세상이라곤 오직 저 뿐인 느낌은 생각보다 더 즐거운 일이랍니다. 물론 광철이 누군가 돌보는 모습은... 영 어색하겠네요.
마침 식사가 나옵니다.
이곳의 밥은 특별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충 입에 넣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아주 뜨거운 딤섬과 평범한 카오야.
그리고 얼음물.
백지혜는 당신 앞으로 얼음물을 놓습니다.
오광철:독립 시킬 생각이었어? 난 선배가 결혼해서 주워온 애 말고 진짜 애를 낳아도 옆에 있을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선배 아내 될 사람 있으면 내게 허락받으라고 해.
보람... 몰라. 필요 없어. (작은 생명의 세상이 나밖에 없다니 부담스러워. 타이밍 좋게 나온 얼음 물을 단숨에 들이켠다. 아무래도 오늘 밥은 다 먹은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평생 볼 일 없으니 어색할 일도 없겠네. 축하해.
백지혜:(시선을 오광철 머리 위로 올리고 눈을 깜빡인다. 먼저 얘기 꺼내긴 했지만 오광철이 애를 돌보는 모습도, 자신이 누군가와 결혼하는 모습도 잘 상상가지 않는다. 기이한 기분마저 들었다. 역시 결혼이니 자식이니 평안한 미래나 꿈꿀 때가 아니었나 싶다. 당장 내일 약이나 옮겨야 하는데...) 광철은 물건 원하는 몇 개에 허락해 줄 거 같아서 싫습니다.
(딤섬을 접시에 덜어두고 열심히 불어대기 시작한다. 5분간 말없이 불기만 했다.) ... (그리곤 오광철 입 앞으로 슥...)
오광철:소중한 선배를 물건 몇 개로 내어주지는 않지. 몇십 개라면 모를까... (이후 말이 끊긴다. 5분 동안 조용히 딤섬 부는 모습만 바라보고, 내밀어진 딤섬을 입에 넣는다.) 뜨거워. 좀 더 식혀줘. (사실 안 뜨거워. 미래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선배랑 살지도 모른다는 점이 질투 나서 투정 부릴 뿐이야.)
백지혜:(턱을 괴고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잘 먹는 거 같은데... 그래도 별말 없이 딤섬 몇 개를 더 집어와 접시째 들어 후후 불기 시작한다. 이번엔 3분 더 불었다.)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지 않습니까? (잠시 접시를 내려두고 카오야를 잘 발라 광철의 접시에 덜어준다.) 이러다 식사 끝나기까지 한평생 걸리겠어요. 다음부턴 그냥 냉국수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배에 음식이 들어가자 몸이 따뜻해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긴장 안 했든... 어쨌든.
오광철:뜨거울 때 먹다가 입천장 데이면 책임질 거야? 어차피 일은 내일 오후 7시라며. 하루 종일 먹어도 안 늦어. (오리 껍질에 뜨거운 딤섬 싸서 그대로 지혜 입에도 넣어준다.) 일 잘 마무리되면 같이 먹으러 갈까? 냉국수는 안 불어줘도 되니 일 잘 풀린 기념으로 먹자. 간만에 편하게 먹게 해줄게.
백지혜:책임지라면 져야죠.이번엔 입안으로 바람을 불어드릴까요? 설마 그 정도로 약하겠나 싶지만- (능청 피우며 말하다 입에 들어온 뜨거운 딤섬에 컥, 하고 뱉을 뻔 한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원망하는 눈빛으로 씹어대길 잠시... 겨우 다 삼키고 미적지근한 물을 입에 붓다시피 한다.) 혀 데였습니다. 책임져 주세요.
오광철:데였어? 설마 이 정도로 데이는 약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나도 선배 입안에 바람 불어줄까? 아님 원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 (들었던 말 그대로 돌려준다. 큭큭거리며 본인 얼음컵에 남아있는 얼음을 상대 물 잔에 넣어주고 얼음컵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딤섬 많이 뜨겁지? 더 불어서 먹여줘야 할 거 같지? 아주 소중하게 말이야.
백지혜:(그대로 돌려받자 눈썹 한쪽을 꿈틀 움직인다. 얼음물을 입에 잠시 담고 삼킨 후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딤섬을 접시 위로 옮긴다.) 됐습니다.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을 거라면 같이 혀 데인 상태나 되어주시죠. 여기서 더 소중하려면 아주 감싸안기라도 해야겠어요. (말은 그리 해놓고 다 식은 딤섬만 집어 입 앞에 꾸욱 들이민다.)
오광철: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소중한 가족한테 혀 데여서 오라 협박하고. 나쁜 사람이네. (내밀어진 딤섬을 젓가락으로 반 나눈다. 둘 중 작은 쪽은 본인 입으로, 큰 쪽은 다시 집어 앞에 있는 사람 입가로 가져간다.) 근데 같이 데여달라며 왜 식은 거 줬어? 진짜 입안에 바람 불어주길 바라서 그래? 해줘?
백지혜:직접 실천한 사람보다 더 나쁠까. 착한 사람이었으면 여기서 안 이러고 있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주워다 범죄에 써먹고 식사 친구로 써먹고. (생긋 웃으며 딤섬 반쪽을 입에 넣는다. 좋게 식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거 같은 맛이군...) 무슨 말을 못 해. 다른 사람이 책임지라고 해도 그럴 겁니까?
오광철:난 데일 줄은 모르고 했던 거고 선배에겐 날 상처 입히려는 고의성이 있었는데도? (음. 그건 그래. 좋은 사람은 이 화륜강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지. 그릇 위에 있는 잘 식은 딤섬 하나를 더 입에 넣는다. 누군가의 삶을 책임 진단 상상에 입맛이 사라진 것만 같았던 아까와는 달리 막상 넣으니까 잘 들어가긴 하네. 나 배고팠나 봐.) 다른 사람을 내가 왜? 걔네랑 내가 무슨 관계라고. 선배니까 고민이라도 하는 거지 모르는 애들이었으면 혀 데인 틈에 찌르고 튀었어.
백지혜:뜨거운 딤섬을 입에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겁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직접 덜어서 먹는 모습을 보자 만족스레 웃는다. 그제야 딤섬이며 카오야며 양껏 집어 먹는다.) 기특하다 해야 할지 경악스럽다 해야 할지, 어디 가서 죽진 않을 거 같아 안심했습니다. 데인 혀에 관한 건 나중에 청구하도록 하죠.
접시가 거의 다 비자 백지혜는 먼저 주인을 불러 계산을 마칩니다.
백지혜:큰 일 도와주니까 제가 사는 겁니다.
원래도 항상 백지혜가 사긴 했어요.
오광철:잘 먹었습니다~
우리들은 식당 바깥으로 나옵니다.
밖은 당연하게도 아까 전과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백지혜:조금만 걷다가 집으로 가서 쉬죠. 내일 힘들 테니까, 체력은 비축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지혜:조금 걷자고 말하긴 했지만, 여긴 산책할 만한 곳이 아닌 거 같습니다. (픽 웃으며 발에 채이는 쓰레기들을 조심히 피해다닌다.) 진짜 부자들은 더 깔끔한 곳에서 살겠죠?
오광철:이제 알았어? 체력 비축을 위해서라면 이런 쓰레기 밭보다 집에서 쉬는 게 나을걸.
부자 동네는 길바닥에 이런 쓰레기도 없을 거고, (이쪽은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줘 쓰레기를 콱. 밟아버리고 지나간다.) 문이 망가져 안 열리는 일도 없을 거고. 좋겠네.(오늘은 한 번에 열려주면 좋을 텐데.) 부자로 살아본 적은 없어서... (아.) 그러니, 기억에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튼 부러워.
백지혜:그래도 바로 들어가면 속 더부룩 하다고, 편하게 못 쉬지 않으십니까. (그의 발밑에서 터져나가는 쓰레기들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다.) 그렇죠... 좀 더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전 나름 이곳이 나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있어서 그런가 정도 들었고 제 집도 있고. 가끔 먹는 국수도 맛있고.
오광철:일러바치진 않겠다며 굳이 내 앞에 나타나 말하는 이유가 뭐야? 뭐 원하는 거 있어?
고우 성:얘기가 빠르겠네요. 맞아요, 저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백지혜, 그자식 사실 개새끼에요. 순진하게 이용당하려는 꼴을 보니 안쓰러워서 이거...
마약을 들여오는 건청련인데, 그 패거리랑 백지혜가 붙어다니는 건 이 거리 사람들이면 다 알음알음 알거든요?
청련 소속인 백지혜가 청련의 물건을 훔쳐서 뭣하겠어요?
지금 이건 다 당신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에요...
시체 안에 마약을 넣어 유통하는 일, 청련이 쓰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당신을 그렇게 쓰려는 거예요.
오광철:그게 무슨 말이야? 너 방금 선배에게 개새끼라고 한 거야? (천천히 상대에게 다가간다.) 그 개새끼가 키우는 자식 이야기는 안 들었어? 그게 난데. (히죽 웃으며 코앞까지 다가간다. 상대의 큰 키에도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고개를 들고, 상대의 발을 짓밟으며 노려본다.) 난 선배 험담하는 자식 말 안 들어. 나를 패키지로 쓰는 일이 있더라도 그건 나랑 선배 사이의 일이지 네가 알 바 아니니까 꺼져. (난 기억을 다 잃고 화륜강을 떠돌던 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걸 데려다 키워준 사람을 어찌 배신하겠어.)
고우 성:윽... 잠깐, 잠시만요. (발이 밟히자 미간을 한껏 좁히고 몸을 뒤로 뺀다. 이정도로 미친 개라는 얘끼는 없었잖아...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래, 그래요 그럼. 둘 사이의 일이라 치고, 그래도 죽는 건 싫을 거 아니에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어.
전 청련의 일을 망쳐야 이득을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구요. 누가 백지혜를 대신 죽이자 했나? 그냥 그 아편을 한 번 더 몰래 빼돌리자 이거죠. 저희 둘이서 한탕 치자구요.
오광철:그래.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발에 체중이 더 실린다.) 성공해도 나랑 선배가 같이 성공해야지, 난 모르는 사람과 같이 축배를 나눌 생각은 없어.
그렇게나 이득을 보고 싶다면 직접 백지혜를 찾아가 청련인지 뭔지를 배신하자고 설득하도록 해. 날 움직이게 하는 건 전부 그 사람에게 달렸으니까. (다시 뒤로 물러난다. 물러나며 지은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온화하기 짝이 없다.) 선배가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고 했어. 그리고 네겐 그 신뢰가 없고. (그야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고우 성:체력이 꽤 좋으신 편이군요. 말할 게 하나 더 있었는데 갑자기 쫓겨서는…. 갑작스런 달리기라니. 그, 제가 아무 근거 없이 아까 전의 제 말들을 덥석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증거가 있어요. 백지혜가 청련 따까리라는. 따라와 보세요. 이거 보시고 나면 저랑 약 빼돌리고 나서도 평생 친구 먹고 싶어질 걸요.
오광철:뭐야. 너 아직도 있었어? (벽에 기대 호흡을 고른다. 거친 숨을 한 번에 내뱉는다.) 말했잖아. 네 말 들을 생각 없다고. 나 설득하려거든 선배부터 설득하고 오라고.
오늘 처음 본 네 말을 내가 왜 믿어야 해? 내가 널 믿을 만한 성의라도 좀 보여봐.
고우 성:그게, 그러니까. 그래서! 신뢰, 신뢰를 드리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따라온다고 손해 볼 거 없잖아요? 가면 절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드릴 수 있어요.
백지혜의 진짜 집, 보여드릴게요.
오광철:손해 볼지도 모르지. 따라갔더니 갑자기 마음 바뀌어서 날 찌르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렇게 대답한 뒤 뒤돌아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랬는데...) 진짜 집? 선배에게 따로 집이 있었어?
고우 성:뭣하면 여기서 제 몸이라도 수색해 보시던지요. (하며 두 팔을 벌리고 선다.) 네, 그렇다니까요. 이상하다 느낀 적 없어요? 아무리 일 때문이라지만 집을 비우는 날이 많고, 물건도 좀 적다 싶었죠?
오광철:...네가 우리 집 상황을 어떻게 아는데? (하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확인만 할 거야. 거짓말이면 내일 몸 안에 아편을 넣는 시체는 네가 될 줄 알아.
오광철:(선배의 옷 취향이나 사이즈는 잘 알고 있다. 가장 쉽게 확인하려면...) (옷장열어봅니다.)
:▶ 옷장
백지혜가 작년에 입었던 옷, 다섯 달 전에 자주 입고 다니던 옷 같은 것들이 낯선 옷들의 뭉치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오광철:(사이즈도? 같아?)
:같습니다.
향도 맡아보지 그래요
오광철:(킁킁...)
:귀여워
오래된 먼지냄새와 함께 백지혜가 쓰는 섬유 유연제 향이 납니다.
오광철:(기분이 안 좋아졌다... 옷들은 그대로 꺼내 바닥에 던져놓고 다음으론책상확인한다.)
:▶ 책상
한 눈에 봐도 손때가 매우 묻은 수첩에펜이 끼워져 있습니다.
오광철:(펜이 끼워진 부분 펼쳐본다............)
:펜이 끼워진 부분에, 정갈하게 접힌[종이 두 묶음]이 끼워져 있습니다. 수첩에는 몇 개의 단어들이 반복해서 적혀 있어요. ‘능력의 단어’, ‘hoax' ’신앙의 공명‘ 같은 것들입니다.
오광철:아까 종교,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수첩에 머리를 한 번 박은 뒤 종이 묶음도 펼쳐 읽어본다.)
:첫 번째 묶음
어떤 책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온 듯 보입니다.
오광철:(이게 뭐지....................?) (다음 묶음도...)
:두 번째 묶음
이것은 책을 뜯어온 게 아니에요, 백지혜의 글씨체로,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된 정보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종이 맨 아래쪽에, 깔끔했던 위쪽의 글씨들과는 다르게 급하게 휘갈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오광철:(그래서 이게 무슨 의민데... 종이에 이마 한 번 더 박은 뒤......................... 일단 챙긴다.)
오광철은 종이에 꿍 했다.
오광철:나중에 가서 직접 물어볼래. (그리고책꽂이로!)
:▶ 책꽂이
소설책과 논문집, 문집과 공책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급하게 쑤셔넣은 듯 마구 꽂혀 있군요. 그 사이에서 가장 최근에 뽑아 본 듯, 튀어나와 있는 책이 한 권 보입니다.
오광철:(또 이상한 이야기 나오면 화내야지. 튀어나온 책 꺼내본다.)
:책? 이건…책이 아니에요.
사진첩입니다.
사진첩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습니다.
매일 거울 안에서 보는 얼굴이에요.
20대의 당신, 10대의 당신, 11살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생겼었을 당신, 4살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생겼었을….당신의 모습들.
사진첩은 온통 당신의 얼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백지혜의 얼굴이 있는 사진이 하나 보입니다.
아주 어린 당신과 함께 찍은 것입니다. 낯선 장소입니다.
낡고 습해 보인다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만, 그 안에서의 당신들은, 적어도, 불안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당신은 말 모양 장난감을 들고 있고, 백지혜는 손에 커피 잔을 든 채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과거가 이 작은 사진첩 안에 들어차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사진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기괴하기까지 합니다….SAN(1/1d3)
오광철: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1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거 펼치면 밥 먹을 때 말했던 선배의 옛날 아이가 있을 거 같았는데. 아무튼 이것도 옛날 아이이긴 한가? 묘하게 만족스럽기도 하고...)
어느 새 근처로 다가온 고우 성은 당신의 손에 들린 사진첩을 곁눈질로 보더니 눈썹을 찌푸립니다.
고우 성:허, 참, 이런 게 다 있군요. 뭐죠? 제가 알기로 당신과 백지혜가 알고 지낸 건 딱 삼 년인데…예전에 키우던 애가 있었다고는 하덥디다만, 아니, 그래도 이렇게 얼굴이 닮을 수 있나.
당신이 백지혜를 만난 건 3년 전, 그는 분명 오갈 곳 없는 당신과는 초면이라고 했습니다.
당신같이 혼자 남겨진 애들은 화륜강 근처에는 드물지 않다는 말이나,
큰 충격을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었는데요….
오광철:내 기억으로도 내가 선배랑 알고 지낸 건 3년이야. 하지만 그 이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사진첩 다시 처음부터 넘기며 바라본다. 웃음소리가 겹친다.) 뭘까? 내 과거일까? 아니면 똑같이 생긴 아이? 이 사진이 나였으면 좋겠어. 내가 이전 아이의 대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러니 사진이 나라고 믿을래.
(그리곤 뒤돌아 고우성을 바라본다.) 고마워. 날 여기로 데려다줘서. 기분은 좀 별로였지만 덕분에 내 가족을 찾게 되었잖아.
백지혜:여기 왜.................? 광철이, 여길 왜. (난장판인 방 안쪽과 그를 번갈아 바라본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왜, 여기 계신 건지... 모르겠군요.
아니,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곧 저흴 죽이려는 사람들이 올 거예요. 어서! 어서 도망갑시다.
같이 가줄 거죠? 빨리 떠나야 해요.
예전에는 제 말을 잘 들으셨잖아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당신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 본 사진첩이 스쳐 지나갑니다.
백지혜가 말하는 예전은 삼 년 전의 얘기일까요,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된 얘기일까요.
오광철:이 사람이 나랑 선배 사이를 이간질했어. 선배에게 또 다른 집이 있다며 날 여기까지 끌고 왔어. 하지만 나 끝까지 선배 믿었어. (기억 속에 있는 3년도, 기억에 없는 그 이전도 둘 다 나라면 이 사람이 하자는 말을 불만 없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말하는 예전이란 단어는 나에게 상관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리고 나 사진 봤어. 말 잘 듣고 따라서 떠날 테니까 제대로 정착하면 이거... (사진첩 내민다.) 나중에 설명해 줄 거지? 가자.
백지혜는 내밀어진 사집첩을 보고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백지혜:그건............... 지금은, 네. 제대로 도망치고 나면 제가 다...!
오광철: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왜 선배를 잡아가려고 하는 거야? 선배를 그것이라고 부르지 마. (앞으로 나서며 등 뒤에 백지혜를 숨기는 듯한 구도를 만든다.) 내가 바라는 건 가족이야. 기억도 안 나는 진짜 가족 말고 3년 동안 날 키워준 가족. 너희에게 막 넘길 순 없어.
(뒤돈다. 백지혜를 바라보고 묻는다.) 더럽힌다는 게 뭐야? 왜 선배가 자해한다고 하니 저 사람들이 멈춰? (이후 이어진 말은 백지혜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냥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그을래?
백지혜:(가족, 바라는 것,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이 하는 말들. 제 앞으로 나선 그의 옷깃을 붙잡는다.) 안 돼, 저 때문에 위험해지시면 안 됩니다. 광철이라도 저들을 쉽게 막을 순 없어요. (고개를 가까이 숙여 다한다. 어디까지 봤을까, 어디까지 알았을까. 제 정체를 알아도 상관없다고 말해준다면....) 꼭 여기서 도망쳐서...